DAY 17제3절 공공사업과 공공 기관의 경비에 대하여

2026 가을, 국부론 제3절지은이 애덤 스미스약 47분
제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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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또는 국가의 셋째이자 마지막 의무는 공공 기관과 공공사업을 세우고 유지하는 의무다. 그런 것들은 큰 사회에는 최고도로 유리할 수 있지만, 그 이윤이 어느 개인이나 소수의 개인에게는 결코 비용을 상환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며, 따라서 어느 개인이나 소수의 개인이 그것을 세우거나 유지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이 의무의 수행에도 사회의 시기에 따라 매우 다른 정도의 비용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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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방위와 사법 행정에 필요한 공공 기관과 공공사업—둘 다 이미 언급했다—다음으로, 이런 종류의 다른 사업과 기관은 주로 사회의 상업을 쉽게 하기 위한 것과 국민의 교육을 증진하기 위한 것이다. 교육을 위한 기관은 두 종류로, 청소년 교육을 위한 것과 모든 연령의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이 여러 종류의 공공사업과 기관의 비용을 가장 적절하게 충당할 수 있는 방식을 고찰하면서, 이 장의 이 제3절을 세 항으로 나누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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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항 사회의 상업을 쉽게 하기 위한 공공사업과 공공 기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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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먼저, 상업 일반을 쉽게 하는 데 필요한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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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도로, 다리, 항행 가능한 운하, 항구 등 어느 나라의 상업을 쉽게 하는 공공사업을 세우고 유지하는 데 사회의 시기에 따라 매우 다른 정도의 비용이 들 수밖에 없다는 것은 증명할 필요도 없이 분명하다. 어느 나라든 공공 도로를 만들고 유지하는 비용은 분명히 그 나라의 토지와 노동의 연간 생산물과 함께, 곧 그 도로로 실어 나르고 운반해야 하는 재화의 양과 무게와 함께 늘어날 수밖에 없다. 다리의 강도는 그 위를 지나갈 것으로 보이는 수레의 수와 무게에 맞춰져야 한다. 항행 가능한 운하의 수심과 급수는 그 위에서 재화를 운반할 것으로 보이는 거룻배의 수와 톤수에 비례해야 하고, 항구의 넓이는 그곳에 피난할 것으로 보이는 선박의 수에 비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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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공사업의 비용을,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 징수와 지출이 행정권에 맡겨져 있는 이른바 공공 수입에서 충당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런 공공사업의 대부분은 사회의 일반 수입에 아무런 부담을 지우지 않고 그 자체의 비용을 충당하기에 충분한 특별 수입을 내도록 쉽게 운영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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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간선도로, 다리, 항행 가능한 운하는 대부분의 경우 그것을 이용하는 수레에 대한 소액의 통행료로 만들고 유지할 수 있다. 항구는 그곳에서 짐을 싣거나 부리는 선박의 톤수에 대한 적당한 입항세로 만들고 유지할 수 있다. 상업을 쉽게 하기 위한 또 하나의 제도인 주조는 많은 나라에서 그 자체의 비용을 충당할 뿐 아니라 군주에게 약간의 수입, 곧 주조세를 준다. 같은 목적을 위한 또 하나의 제도인 우체국은 그 자체의 비용을 충당하고도 거의 모든 나라에서 군주에게 매우 상당한 수입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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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선도로나 다리를 지나는 수레와 항행 가능한 운하를 오가는 거룻배가 그 무게나 톤수에 비례하여 통행료를 낼 때, 그들은 그 공공사업의 유지비를 정확히 자기가 그것에 일으키는 마모에 비례하여 내는 것이다. 그런 사업을 유지하는 데 이보다 더 공평한 방식을 고안하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또한 이 세금 또는 통행료는 운송업자가 선납하지만 결국 소비자가 내며, 그것은 언제나 재화의 가격에 포함되어 소비자에게 부과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공공사업 덕분에 운송비가 매우 크게 줄어들므로, 통행료에도 불구하고 재화는 그렇지 않았을 경우보다 소비자에게 더 싸게 들어온다. 그 가격이 통행료로 오르는 정도가 운송비의 저렴함으로 내리는 정도보다 작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금을 결국 내는 사람은 그 세금을 내서 잃는 것보다 그 용도로 얻는 것이 더 많다. 그의 지불은 정확히 그의 이득에 비례한다. 그것은 실제로 나머지 이득을 얻기 위해 그가 내놓아야 하는 그 이득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보다 더 공평한 과세 방법은 상상할 수 없는 것 같다. 사치용 수레, 곧 마차나 역마차 등에 대한 통행료를 짐수레나 짐마차 등 필수적인 용도의 수레보다 그 무게에 비해 다소 높게 매기면, 부자의 나태와 허영이 나라의 모든 지역으로 무거운 재화를 더 싸게 운송하게 함으로써 매우 손쉬운 방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에 기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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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선도로, 다리, 운하 등이 이런 방식으로 그것을 통해 영위되는 상업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면, 그것은 그 상업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만, 따라서 그것을 만드는 것이 적절한 곳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또한 그 비용, 그 웅장함과 화려함도 그 상업이 지불할 수 있는 정도에 맞춰져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그것을 만드는 것이 적절한 방식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상업이 거의 또는 전혀 없는 황량한 지방에, 또는 단지 그것이 마침 지방 지사의 시골 별장이나 지사가 환심을 사는 것이 편리하다고 여기는 어느 대영주의 별장으로 이어진다는 이유만으로, 웅장한 간선도로를 만들 수는 없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곳에, 또는 단지 이웃 궁전의 창에서 보는 경치를 꾸미기 위해 강 위에 큰 다리를 놓을 수는 없다. 이런 종류의 사업이 그것 자체가 낼 수 있는 수입이 아닌 다른 수입으로 수행되는 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때때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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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운하의 통행료나 갑문세는 개인의 재산이며, 그들의 사적 이익은 그들로 하여금 운하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운하가 그럭저럭 괜찮은 상태로 유지되지 않으면 항행이 필연적으로 완전히 중단되고, 그와 함께 그들이 통행료로 얻을 수 있는 이윤 전체도 사라진다. 만일 그 통행료를 그 자신은 그것에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위원들의 관리 아래 둔다면, 그들은 그 통행료를 낳는 사업의 유지에 덜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랑그도크 운하는 프랑스 국왕과 그 지방에 1,300만 리브르 이상의 비용을 들였는데, 그것은 (지난 세기 말 프랑스 화폐의 가치인 은 1마르크당 28리브르로 계산하여) 90만 파운드 이상에 달했다. 그 대사업이 완성되었을 때, 그것을 늘 수리된 상태로 유지하는 가장 가능성 높은 방법은 그 사업을 계획하고 지휘한 기술자 리케(Riquet)에게 통행료를 선물하는 것임이 밝혀졌다. 그 통행료는 현재 그 신사 가문의 여러 분가에 매우 큰 재산이 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그 사업을 늘 수리된 상태로 유지하는 데 큰 이해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만일 그 통행료가 그런 이해관계가 없는 위원들의 관리 아래 놓였다면, 그것은 아마 장식적이고 불필요한 지출로 낭비되고, 그사이에 사업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황폐해지도록 내버려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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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선도로 유지를 위한 통행료는 결코 안심하고 개인의 재산으로 만들 수 없다. 운하는 완전히 방치되면 전혀 통행할 수 없게 되지만, 간선도로는 완전히 방치되어도 전혀 통행할 수 없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간선도로 통행료의 소유자들은 도로의 수리를 완전히 방치하면서도 거의 같은 통행료를 계속 징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업의 유지를 위한 통행료는 위원이나 수탁자의 관리 아래 두는 것이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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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브리튼에서는 수탁자들이 그 통행료를 관리하면서 저지른 폐해가 많은 경우 매우 정당하게 불평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유료 도로(turnpike)에서 징수되는 돈은 그 사업을 가장 완전하게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것의 두 배가 넘는데, 그 사업은 흔히 매우 엉성하게 수행되고 때로는 전혀 수행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통행료로 간선도로를 수리하는 제도는 그다지 오래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아직 그것이 이를 수 있을 것 같은 완성의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비천하고 부적절한 사람들이 흔히 수탁자로 임명되고, 그들의 행동을 통제하고 통행료를 그들이 해야 할 사업을 수행하기에 겨우 충분한 정도로 줄이기 위한 적절한 감사 및 회계 기관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면, 그 제도가 새롭다는 것이 그 결함을 설명해 주는 동시에 변명해 준다. 그리고 그 결함의 대부분은 의회의 지혜로 때가 되면 점차 바로잡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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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브리튼의 여러 유료 도로에서 징수되는 돈은 도로 수리에 필요한 것을 크게 넘는다고 여겨지므로, 적절한 절약으로 그것에서 얻을 수 있는 잉여는 일부 대신들조차 언젠가 국가의 위급한 필요에 쓸 수 있는 매우 큰 재원으로 여겨 왔다. 정부가 유료 도로의 관리를 직접 맡고, 급료를 아주 조금만 더 주어도 일할 병사들을 고용하면, 임금에서 생활 자료 전부를 얻는 노동자밖에 고용할 수 없는 수탁자들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도로를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고들 했다. 이런 방식으로 국민에게 아무런 새 부담을 지우지 않고 큰 수입, 아마 50만 파운드 {이 책의 처음 두 판을 낸 뒤, 나는 그레이트브리튼에서 징수되는 모든 유료 도로 통행료가 50만 파운드에 이르는 순수입을 내지 못한다고 믿을 충분한 이유를 얻었다. 그 금액은 정부의 관리 아래에서는 왕국의 주요 도로 다섯 개를 수리하기에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를 얻을 수 있으며, 유료 도로가 현재 우체국이 그러하듯 국가의 일반 경비에 기여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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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식으로 상당한 수입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아마 이 계획의 입안자들이 생각한 만큼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 자체는 몇 가지 매우 중요한 반론을 받을 만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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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유료 도로에서 징수되는 통행료가 일단 국가의 위급한 필요를 충당하는 재원의 하나로 여겨지면, 그것은 확실히 그 필요가 요구한다고 여겨지는 대로 인상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레이트브리튼의 정책으로 보아 그것은 아마 매우 빠르게 인상될 것이다. 그것에서 큰 수입을 쉽게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은 아마 행정부가 매우 자주 이 재원에 의존하도록 부추길 것이다. 현재의 통행료에서 어떤 절약으로 50만 파운드를 아낄 수 있을지는 아마 의심스럽다는 정도를 넘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두 배로 올리면 100만 파운드를, 세 배로 올리면 아마 200만 파운드를 아낄 수 있으리라는 것은 거의 의심할 수 없다. {나는 이제 이 모든 추정 금액이 훨씬 지나치게 크다고 믿을 충분한 이유를 얻었다.} 게다가 이 큰 수입은 그것을 징수하고 수납할 새 관리를 한 명도 임명하지 않고 징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료 도로 통행료가 이런 방식으로 계속 인상되면, 그것은 현재처럼 나라의 국내 상업을 쉽게 하는 대신 곧 그것에 매우 큰 짐이 될 것이다. 모든 무거운 재화를 나라의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운송하는 비용이 곧 매우 크게 늘고, 따라서 그런 모든 재화의 시장이 곧 매우 좁아져서, 그 생산이 상당 부분 억제되고 나라의 국내 산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문들이 완전히 소멸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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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수레에 그 무게에 비례하여 매기는 세금은 도로 수리라는 유일한 목적에 쓰일 때는 매우 공평한 세금이지만, 다른 어떤 목적이나 국가의 일반적 필요를 충당하는 데 쓰일 때는 매우 불공평한 세금이다. 그것이 위에서 말한 유일한 목적에 쓰일 때는, 각 수레가 그 수레가 도로에 일으키는 마모에 대해 정확히 지불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어떤 목적에 쓰일 때는, 각 수레가 그 마모 이상을 지불하여 국가의 다른 어떤 필요를 충당하는 데 기여한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유료 도로 통행료는 재화의 가격을 그 가치가 아니라 무게에 비례하여 올리므로, 그것은 주로 값비싸고 가벼운 상품의 소비자가 아니라 조잡하고 부피 큰 상품의 소비자가 낸다. 그러므로 이 세금으로 어떤 국가의 필요를 충당하려 하든, 그 필요는 주로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의 비용으로, 곧 그것을 충당할 능력이 가장 많은 사람이 아니라 가장 적은 사람의 비용으로 충당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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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정부가 언젠가 간선도로의 수리를 소홀히 한다면, 유료 도로 통행료의 어느 부분이든 적절하게 쓰도록 강제하기가 현재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방식으로 징수된 수입이 마땅히 쓰여야 할 유일한 목적에 그 어떤 부분도 쓰이지 않은 채 국민에게서 큰 수입이 징수될 수 있을 것이다. 유료 도로 수탁자들의 비천함과 가난이 현재 때로 그들에게 잘못을 바로잡도록 강제하기 어렵게 만든다면, 여기서 가정하는 경우에는 정부의 부와 위세가 그것을 열 배는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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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는 간선도로 수리에 쓰일 기금이 행정권의 직접 지휘 아래 있다. 그 기금은 일부는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농촌 주민이 간선도로 수리를 위해 바쳐야 하는 일정 일수의 노동으로, 일부는 국왕이 다른 지출에서 떼어 내기로 한 국가 일반 수입의 일부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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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옛 법에 따르면, 그리고 유럽 대부분의 다른 지역의 법에 따르면, 농촌 주민의 노동은 국왕 참사회에 직접 종속되지 않는 지방 또는 주(州)의 관청의 지휘 아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관행에 따르면, 농촌 주민의 노동과 국왕이 어느 특정 지방이나 징세구(generality)의 간선도로 수리에 배정하기로 한 다른 모든 기금은 전적으로 지사(intendant)의 관리 아래 있다. 지사는 국왕 참사회가 임명하고 해임하며, 그로부터 명령을 받고, 그와 끊임없이 연락하는 관리다. 전제정이 진행됨에 따라 행정권의 권위는 국가의 다른 모든 권력의 권위를 점차 흡수하며, 어떤 공공 목적에 쓰일 모든 수입 부문의 관리를 스스로 떠맡는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큰 역참 도로, 곧 왕국의 주요 도시들 사이를 잇는 도로는 대체로 좋은 상태로 유지되며, 어떤 지방에서는 잉글랜드의 대부분의 유료 도로보다 훨씬 낫기까지 하다. 그러나 우리가 샛길이라고 부르는 것, 곧 시골 도로의 단연 대부분은 완전히 방치되어 있으며, 많은 곳에서 무거운 수레는 전혀 지나갈 수 없다. 어떤 곳에서는 말을 타고 여행하는 것조차 위험하며, 노새만이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탈것이다. 허세 부리는 궁정의 오만한 대신은 주요 귀족들이 자주 보게 되는 큰 간선도로 같은 화려하고 웅장한 사업을 수행하는 데서 흔히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그들의 칭찬은 그의 허영심을 만족시킬 뿐 아니라 궁정에서의 그의 이익을 떠받치는 데에도 기여한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 크게 눈에 띄거나 어떤 여행자에게서도 조금의 찬탄도 불러일으킬 수 없고, 요컨대 극도의 유용성 외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많은 작은 사업을 수행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그토록 위대한 관리의 주의를 받기에는 너무 비천하고 하찮은 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런 행정 아래에서 그런 사업은 거의 언제나 완전히 방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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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아시아의 다른 여러 정부에서는 행정권이 간선도로의 수리와 항행 가능한 운하의 유지를 모두 떠맡는다. 각 지방 총독에게 내리는 훈령에서 그 사업은 늘 그에게 권고되며, 궁정이 그의 행동에 대해 내리는 판단은 그가 훈령의 이 부분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가에 크게 좌우된다고 한다. 그래서 공공 행정의 이 부문은 그 모든 나라에서, 특히 중국에서 매우 중시된다고 한다. 중국의 간선도로, 그리고 더욱이 항행 가능한 운하는 유럽에 알려진 같은 종류의 어떤 것보다도 훨씬 뛰어나다고 주장된다. 그러나 유럽에 전해진 그 사업에 관한 기록은 대개 판단력이 약하고 경탄하기 잘하는 여행자들이, 흔히는 어리석고 거짓말하는 선교사들이 작성한 것이었다. 만일 그것이 더 총명한 눈으로 조사되고 더 충실한 증인들이 그에 관한 기록을 보고했다면, 아마 그렇게 경이롭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베르니에(Bernier)가 힌두스탄의 이런 종류의 몇몇 사업에 관해 기록한 것은 그보다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다른 여행자들이 보고한 것에 크게 못 미친다. 또한 그 나라들에서도 아마 프랑스에서처럼 궁정과 수도에서 화젯거리가 될 법한 큰 도로, 큰 교통로만 중시되고 나머지는 모두 방치되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중국, 힌두스탄, 그리고 아시아의 다른 여러 정부에서 군주의 수입은 거의 전적으로 지조나 지대에서 나오며, 그것은 토지 연간 생산물의 증감에 따라 증감한다. 그러므로 그런 나라에서 군주의 큰 이익, 곧 그의 수입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토지의 경작, 그 생산물의 크기, 그 생산물의 가치와 결부되어 있다. 그런데 그 생산물을 가능한 한 크고 가치 있게 만들려면, 그것에 가능한 한 넓은 시장을 마련해야 하며, 따라서 나라의 모든 지역 사이에 가장 자유롭고 가장 쉽고 가장 비용이 덜 드는 교통을 확립해야 한다. 그것은 가장 좋은 도로와 가장 좋은 항행 가능한 운하로써만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 어디에서도 군주의 수입은 주로 지조나 지대에서 나오지 않는다. 유럽의 모든 큰 왕국에서 아마 그 대부분은 궁극적으로 토지 생산물에 의존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의존은 그렇게 직접적이지도 분명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유럽에서 군주는 토지 생산물의 양과 가치 양쪽의 증가를 증진하거나, 좋은 도로와 운하를 유지함으로써 그 생산물에 가장 넓은 시장을 마련하라는 요구를 그렇게 직접 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 공공 행정의 이 부문이 행정권에 의해 매우 적절히 관리된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나는 그것이 적잖이 의심스럽다고 생각하지만—현재의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유럽 어디에서든 그 권력이 그것을 그럭저럭 관리할 수 있을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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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질상 자기를 유지할 수입을 낼 수 없지만 그 편익이 거의 어느 특정 장소나 지역에 국한되는 공공사업조차, 언제나 행정권이 관리할 수밖에 없는 국가의 일반 수입보다는 지방 또는 주 행정의 관리 아래 있는 지방 또는 주의 수입으로 더 잘 유지된다. 만일 런던의 거리를 국고의 비용으로 밝히고 포장한다면, 그것이 현재만큼 잘 밝혀지고 포장되거나, 현재만큼 적은 비용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겠는가? 게다가 그 비용은 이 경우 런던의 각 특정 거리나 교구나 지역 주민에 대한 지방세로 조달되는 대신 국가의 일반 수입에서 충당될 것이고, 따라서 왕국의 모든 주민에 대한 세금으로 조달될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대부분은 런던 거리의 조명과 포장에서 아무런 혜택도 얻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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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또는 주의 수입에 대한 지방 또는 주의 행정에 때로 스며드는 폐해는 아무리 엄청나 보여도, 실제로는 거의 언제나 대제국의 수입의 관리와 지출에서 흔히 일어나는 폐해에 비하면 매우 사소하다. 게다가 그것은 훨씬 쉽게 바로잡을 수 있다. 그레이트브리튼의 치안판사들의 지방 또는 주 행정 아래에서, 농촌 주민이 간선도로 수리를 위해 바쳐야 하는 6일의 노동은 아마 언제나 매우 현명하게 쓰이지는 않겠지만, 잔혹하거나 억압적인 방식으로 징발되는 일은 거의 없다. 프랑스에서는 지사들의 행정 아래 그 사용이 언제나 더 현명한 것도 아니며, 징발은 흔히 가장 잔혹하고 억압적이다. 이른바 부역(corvees)은 그 관리들이 불행히도 자기 눈 밖에 난 교구나 공동체(communeaute)를 응징하는 주된 압제 수단의 하나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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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의 특정 부문을 쉽게 하는 데 필요한 공공사업과 공공 기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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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말한 공공사업과 공공 기관의 목적은 상업 일반을 쉽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업의 어떤 특정 부문을 쉽게 하려면 특정한 기관이 필요하며, 그것은 다시 특정한 특별 비용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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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개하고 문명화되지 않은 민족과 영위하는 상업의 어떤 특정 부문은 특별한 보호를 필요로 한다. 보통의 창고나 상관으로는 아프리카 서해안과 무역하는 상인들의 재화를 거의 안전하게 지킬 수 없다. 그 재화를 미개한 토착민으로부터 지키려면 그것을 보관하는 장소를 어느 정도 요새화해야 한다. 힌두스탄 정부의 혼란은 그 온순하고 부드러운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비슷한 예방책을 필요하게 만든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동인도 회사가 그 나라에서 처음 소유한 요새를 세우도록 허락받은 것은 그들의 신체와 재산을 폭력으로부터 지킨다는 구실 아래서였다. 강력한 정부가 어떤 외국인에게도 자기 영토 안에 요새화된 장소를 소유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다른 국민들 사이에서는, 자기 동포들 사이에 생기는 분쟁을 그들 자신의 관습에 따라 판결하고, 토착민과의 분쟁에서는 공적 지위를 이용해 더 큰 권위로 개입하여 그들이 어떤 개인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한 보호를 줄 수 있는 대사나 공사나 영사를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상업의 이익 때문에 전쟁이나 동맹의 목적으로는 필요하지 않았을 외국에도 공사를 두어야 할 필요가 흔히 생겼다. 튀르키예 회사(Turkey company)의 상업이 처음으로 콘스탄티노플에 상주 대사를 설치하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에 대한 잉글랜드의 첫 사절단들은 전적으로 상업적 이익에서 생겼다. 그 이익을 둘러싸고 유럽 여러 나라 신민 사이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끊임없는 충돌이 아마 평시에도 모든 이웃 나라에 대사나 공사를 상주시키는 관습을 도입했을 것이다. 고대에는 알려지지 않은 이 관습은 15세기 말이나 16세기 초보다, 곧 상업이 처음으로 유럽 대부분의 국민에게 확대되기 시작하고 그들이 처음으로 상업의 이익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 때보다 더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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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의 어떤 특정 부문의 보호가 일으키는 특별 비용을 그 특정 부문에 대한 적당한 세금으로 충당하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은 것 같다. 예컨대 상인들이 처음 그 부문에 들어갈 때 내는 적당한 가입금으로, 또는 더 공평하게는 그 무역을 하는 특정 나라로 수입하거나 그 나라에서 수출하는 재화에 대한 몇 퍼센트의 특별 관세로 충당하는 것이다. 해적과 약탈자로부터 무역 일반을 보호하는 것이 관세를 처음 제정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역 일반을 보호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무역에 일반세를 부과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겨졌다면, 무역의 특정 부문을 보호하는 특별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그 특정 부문에 특별세를 부과하는 것도 똑같이 합리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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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일반의 보호는 언제나 국가 방위에 필수적인 것으로, 그런 까닭에 행정권의 의무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므로 일반 관세의 징수와 사용은 언제나 그 권력에 맡겨져 왔다. 그런데 무역의 어떤 특정 부문의 보호는 무역 일반의 보호의 일부이며, 따라서 그 권력의 의무의 일부다. 그리고 국민들이 언제나 일관되게 행동한다면, 그런 특정한 보호의 목적으로 징수하는 특별 관세도 언제나 똑같이 그 권력의 처분에 맡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다른 많은 점에서와 마찬가지로 국민들이 언제나 일관되게 행동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유럽의 대부분의 상업 국가에서 특정한 상인 회사들이 입법부를 교묘하게 설득하여 군주의 의무 가운데 이 부분의 수행을 그것과 필연적으로 결부된 모든 권한과 함께 자기들에게 맡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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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사들은 국가가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기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실험을 자기 비용으로 함으로써 어떤 상업 부문을 처음 도입하는 데에는 아마 유용했을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보편적으로 부담스럽거나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났으며, 무역을 잘못 운영하거나 제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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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회사들이 공동 자본으로 무역하지 않고, 적절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면 누구든 일정한 가입금을 내고 회사의 규칙에 따르기로 동의하면 받아들여야 하며, 각 회원이 자기 자본으로 자기 위험 부담 아래 무역할 때, 그 회사를 규제 회사(regulated company)라고 부른다. 그 회사들이 공동 자본으로 무역하고, 각 회원이 이 자본에 대한 자기 지분에 비례하여 공동의 이윤이나 손실을 나눌 때, 그 회사를 합자회사(joint-stock company)라고 부른다. 그런 회사들은 규제 회사든 합자회사든 독점적 특권을 가지기도 하고 가지지 않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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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회사는 모든 면에서 유럽 모든 나라의 도시와 읍에 흔한 직종별 동업조합과 닮았으며, 같은 종류의 일종의 확대된 독점이다. 읍의 어떤 주민도 먼저 동업조합에서 자유민 자격을 얻지 않고는 조합에 속한 직종을 영위할 수 없듯이, 대부분의 경우 국가의 어떤 신민도 먼저 그 규제 회사의 회원이 되지 않고는 규제 회사가 설립된 대외무역 부문을 합법적으로 영위할 수 없다. 그 독점은 가입 조건이 얼마나 어려우냐에 따라, 그리고 회사 이사들이 얼마나 큰 권한을 가졌느냐, 곧 무역의 대부분을 자기와 자기 측근에게 한정하는 방식으로 운영할 힘을 얼마나 가졌느냐에 따라 더 엄격하거나 덜 엄격하다. 가장 오래된 규제 회사들에서는 도제 제도의 특권이 다른 동업조합에서와 같았으며, 회사 회원 밑에서 도제 기간을 마친 사람에게 가입금을 내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보다 훨씬 적은 가입금만 내고 스스로 회원이 될 자격을 주었다. 법이 억제하지 않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통상의 동업조합 정신이 모든 규제 회사를 지배한다. 그들의 타고난 기질대로 행동하도록 허용되었을 때, 그들은 언제나 경쟁을 될 수 있는 한 적은 수의 사람에게 한정하기 위해 무역에 많은 성가신 규제를 가하려 애썼다. 법이 그들이 이렇게 하지 못하게 억제했을 때, 그들은 완전히 쓸모없고 하찮은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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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그레이트브리튼에 존속하는 대외 상업을 위한 규제 회사는 지금은 보통 함부르크 회사라고 불리는 옛 모험 상인 회사(merchant-adventurers company), 러시아 회사, 이스틀랜드 회사(Eastland company), 튀르키예 회사, 아프리카 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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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회사의 가입 조건은 지금은 매우 쉽다고 한다. 그리고 이사들은 무역에 어떤 성가신 제한이나 규제를 가할 힘이 없거나, 적어도 최근에는 그 힘을 행사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지난 세기 중엽 무렵 가입금은 50파운드였고, 한때는 100파운드였으며, 회사의 행동은 지극히 억압적이었다고 한다. 1643년, 1645년, 1661년에 잉글랜드 서부의 모직물 제조업자와 자유 무역업자들은 무역을 제한하고 나라의 제조업을 억압하는 독점자로서 그들을 의회에 고발했다. 그 고발로 의회 법이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아마 회사를 상당히 위협하여 행동을 고치지 않을 수 없게 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 이후로는 그들에 대한 불평이 없었다. 윌리엄 3세 10·11년 법 제6장으로 러시아 회사의 가입금은 5파운드로, 찰스 2세 25년 법 제7장으로 이스틀랜드 회사의 가입금은 40실링으로 인하되었고, 동시에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곧 발트해 북쪽의 모든 나라가 그 독점 특허장의 적용에서 제외되었다. 그 회사들의 행동이 아마 그 두 의회 법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 전에 조사이아 차일드 경(Sir Josiah Child)은 이 두 회사와 함부르크 회사를 모두 지극히 억압적이라고 묘사했으며, 당시 우리가 그들 각각의 특허장에 포함된 나라들과 영위하던 무역의 부진을 그들의 잘못된 운영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런 회사들이 오늘날 그다지 억압적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확실히 완전히 쓸모없다. 실로 단지 쓸모없다는 것은 아마 규제 회사에 정당하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세 회사는 모두 현재 상태에서 이 찬사를 받을 만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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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회사의 가입금은 예전에는 26세 미만인 모든 사람에게 25파운드, 그 이상인 모든 사람에게 50파운드였다. 순전한 상인 외에는 누구도 가입할 수 없었는데, 이 제한은 모든 소매상인과 소매업자를 배제했다. 한 내규에 따라 브리튼 제조품은 회사의 공동 선박에 싣지 않고는 튀르키예로 수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선박은 언제나 런던항에서 출항했으므로, 이 제한은 무역을 그 비용이 많이 드는 항구에, 그리고 무역업자를 런던과 그 인근에 사는 사람들로 한정했다. 다른 내규에 따라 런던에서 20마일 이내에 살면서 런던시의 자유민이 아닌 사람은 누구도 회원이 될 수 없었다. 이 또 하나의 제한은 앞의 제한과 결합하여 필연적으로 런던 자유민 외의 모든 사람을 배제했다. 그 공동 선박의 선적과 출항 시기는 전적으로 이사들에게 달려 있었으므로, 그들은 쉽게 자기와 자기 측근의 재화로 배를 채우고, 제안이 너무 늦었다고 둘러댈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을 배제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상태에서 이 회사는 모든 면에서 엄격하고 억압적인 독점이었다. 그 폐해가 조지 2세 26년 법 제18장의 계기가 되었다. 이 법은 가입금을 나이의 구별 없이, 그리고 순전한 상인이나 런던 자유민이라는 제한 없이 모든 사람에게 20파운드로 인하했다. 그리고 그런 모든 사람에게, 일반 관세와 회사의 필요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부과된 특별 관세를 내고, 동시에 튀르키예에 상주하는 브리튼 대사와 영사들의 합법적 권위와 정식으로 제정된 회사 내규에 따르는 조건으로, 그레이트브리튼의 모든 항구에서 튀르키예의 어느 항구로든 수출이 금지되지 않은 모든 브리튼 재화를 수출할 자유를 주었다. 그 내규로 인한 억압을 막기 위해, 같은 법은 회사의 회원 일곱 명이 이 법이 통과된 뒤 제정된 어떤 내규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면, 그 내규가 제정된 뒤 12개월 안에 제기하는 한, 무역식민위원회(board of trade and plantations)(지금은 추밀원의 한 위원회가 그 권한을 이어받았다)에 항소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회원 일곱 명이 이 법이 통과되기 전에 제정된 어떤 내규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면, 이 법이 시행되는 날부터 12개월 안이라면 같은 항소를 제기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1년의 경험이 언제나 큰 회사의 모든 회원에게 특정 내규의 해로운 경향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여럿이 나중에 그것을 발견한다면, 무역위원회도 추밀원 위원회도 그들에게 아무런 구제를 줄 수 없다. 게다가 모든 규제 회사의 내규, 그리고 다른 모든 동업조합의 내규 대부분의 목적은 이미 회원인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이라기보다 다른 사람들이 회원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높은 가입금뿐 아니라 다른 많은 술책으로도 할 수 있다. 그런 회사들의 변함없는 목표는 언제나 자기 이윤율을 될 수 있는 한 높이고, 자기가 수출하는 재화와 수입하는 재화의 시장을 모두 될 수 있는 한 공급 부족 상태로 두는 것이다. 이는 경쟁을 제한하거나 새로운 모험 상인이 그 무역에 들어오지 못하게 함으로써만 할 수 있다. 게다가 20파운드의 가입금도, 계속 영위할 생각으로 튀르키예 무역에 들어오려는 사람을 막기에는 아마 충분하지 않겠지만, 투기적인 상인이 단 한 번의 모험을 거는 것을 막기에는 충분할 수 있다. 모든 무역에서 정규로 자리 잡은 무역업자들은 동업조합을 이루지 않았더라도 자연히 결탁하여 이윤을 올리려 하며, 이윤이 언제나 적정 수준으로 억제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투기적 모험 상인들의 이따금의 경쟁에 의해서다. 튀르키예 무역은 이 의회 법으로 어느 정도 개방되었지만, 많은 사람은 여전히 그것이 완전히 자유로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긴다. 튀르키예 회사는 대사 한 명과 영사 두세 명의 유지에 기여하는데, 그들은 다른 공사들과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국가가 부양해야 하며, 무역은 국왕 폐하의 모든 신민에게 개방되어야 한다. 회사가 이 목적과 다른 동업조합 목적을 위해 징수하는 여러 세금은 국가가 그런 공사들을 부양하기에 충분하고도 훨씬 남는 수입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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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이아 차일드 경이 지적했듯이, 규제 회사는 흔히 공사를 부양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무역하는 나라들에 요새나 수비대를 유지한 적은 없었다. 반면 합자회사는 흔히 그렇게 했다. 그리고 실제로 전자는 이런 종류의 일에 후자보다 훨씬 부적합한 것 같다. 첫째, 규제 회사의 이사들은 그런 요새와 수비대를 유지하는 목적인 회사의 전체 무역의 번영에 아무런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다. 그 전체 무역의 쇠퇴가 오히려 흔히 그들 자신의 사적 무역에 이로울 수도 있다. 경쟁자의 수를 줄임으로써 그들이 더 싸게 사고 더 비싸게 팔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합자회사의 이사들은 자기 관리에 맡겨진 공동 자본에서 얻는 이윤의 자기 몫만을 가질 뿐이므로, 그 이익이 회사의 전체 무역의 이익과 분리될 수 있는 자기만의 사적 무역이 없다. 그들의 사적 이익은 회사의 전체 무역의 번영, 그리고 그것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요새와 수비대의 유지와 결부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유지에 필연적으로 필요한 지속적이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가능성이 더 크다. 둘째, 합자회사의 이사들은 언제나 큰 자본, 곧 회사의 공동 자본을 관리하며, 그 일부를 그런 필요한 요새와 수비대를 짓고 수리하고 유지하는 데 흔히 적절하게 쓸 수 있다. 그러나 규제 회사의 이사들은 공동 자본을 관리하지 않으므로, 가입금과 회사의 무역에 부과된 조합세에서 생기는 임시 수입 외에는 이런 식으로 쓸 다른 기금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런 요새와 수비대의 유지에 주의를 기울일 같은 이해관계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 주의를 효과적으로 만들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공사의 유지는 주의가 거의 필요 없고 적당하고 한정된 비용만 드는 일이므로, 규제 회사의 기질과 능력에 훨씬 더 맞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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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사이아 차일드 경의 시대에서 오랜 뒤인 1750년에 규제 회사 하나가 설립되었으니, 현재의 아프리카 무역 상인 회사다. 이 회사는 처음에는 블랑곶(Cape Blanc)과 희망봉 사이에 있는 모든 브리튼 요새와 수비대의 유지를, 나중에는 루주곶(Cape Rouge)과 희망봉 사이에 있는 것들만의 유지를 명시적으로 맡았다. 이 회사를 설립한 법(조지 2세 23년 법 제51장)은 두 가지 뚜렷한 목적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첫째는 규제 회사의 이사들에게 자연스러운 억압적이고 독점적인 정신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에게 자연스럽지 않은 요새와 수비대의 유지에 대한 주의를 될 수 있는 한 기울이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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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첫째 목적을 위해 가입금은 40실링으로 제한된다. 회사는 법인 자격으로, 또는 공동 자본으로 무역하는 것, 공동 인장으로 돈을 빌리는 것, 그리고 무역에 어떤 제한을 가하는 것이 금지된다. 무역은 모든 장소에서, 그리고 브리튼 신민으로서 가입금을 내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영위할 수 있다. 운영은 런던에서 모이는 9인 위원회가 맡는데, 위원은 런던, 브리스틀, 리버풀의 회사 자유민들이 각 장소에서 세 명씩 해마다 선출한다. 어떤 위원도 3년 넘게 연임할 수 없다. 어떤 위원이든 자기 변호를 들은 뒤 무역식민위원회, 지금은 추밀원 위원회가 해임할 수 있다. 위원회는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수출하거나 아프리카 재화를 그레이트브리튼으로 수입하는 것이 금지된다. 그러나 그들은 요새와 수비대의 유지를 맡고 있으므로, 그 목적을 위해 그레이트브리튼에서 아프리카로 여러 종류의 재화와 물자를 수출할 수 있다. 그들이 회사에서 받는 돈 가운데에서, 런던, 브리스틀, 리버풀의 서기와 대리인의 봉급, 런던 사무소의 집세, 그리고 잉글랜드에서의 관리, 수수료, 대리업의 모든 다른 비용을 위해 800파운드를 넘지 않는 금액이 허용된다. 이 여러 비용을 충당하고 이 금액에서 남는 것은 그들이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적절하다고 여기는 방식대로 자기들끼리 나눌 수 있다. 이 구조로 독점 정신이 효과적으로 억제되고, 이 가운데 첫째 목적이 충분히 달성되리라고 기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조지 3세 4년 법 제20장으로 세네갈 요새와 그 모든 부속지가 아프리카 무역 상인 회사에 귀속되었는데도, 이듬해(조지 3세 5년 법 제44장으로) 세네갈과 그 부속지뿐 아니라 남(南)바르바리의 살레(Sallee)항에서 루주곶에 이르는 해안 전체가 그 회사의 관할에서 제외되어 왕실에 귀속되었고, 그곳과의 무역은 국왕 폐하의 모든 신민에게 자유롭다고 선언되었다. 회사가 무역을 제한하고 일종의 부적절한 독점을 확립했다는 혐의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지 2세 23년 법의 규정 아래에서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는 상상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런데 하원의 인쇄된 토론 기록—언제나 가장 믿을 만한 진실의 기록은 아니지만—에서 나는 그들이 이런 혐의로 고발되었음을 본다. 9인 위원회의 위원들은 모두 상인이고, 여러 요새와 거류지의 총독과 대리인들은 모두 그들에게 의존하므로, 후자가 전자의 위탁 화물과 위탁 업무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으며, 그렇게 되면 실질적인 독점이 확립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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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둘째 목적, 곧 요새와 수비대의 유지를 위해 의회는 그들에게 해마다 일정 금액, 대개 약 1만 3천 파운드를 배정해 왔다. 이 금액의 적절한 사용에 대해 위원회는 해마다 재무법원의 커시터 배런(cursitor baron)에게 보고해야 하며, 그 보고는 나중에 의회에 제출된다. 그러나 수백만 파운드의 사용에도 그토록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의회가 연 1만 3천 파운드의 사용에 많은 주의를 기울일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재무법원의 커시터 배런은 그 직업과 교육으로 보아 요새와 수비대의 적절한 비용에 깊이 정통할 것 같지 않다. 물론 국왕 폐하의 해군 함장들이나 해군성이 임명한 다른 장교들이 요새와 수비대의 상태를 조사하여 그 소견을 해군성에 보고할 수 있다. 그러나 해군성은 위원회에 대해 직접적인 관할권이 없는 것 같고, 그렇게 조사할 수 있는 사람들의 행동을 바로잡을 권한도 없는 것 같다. 게다가 국왕 폐하의 해군 함장들이 언제나 축성학에 깊이 정통하다고 여겨지지도 않는다. 3년의 임기 동안만 누릴 수 있고, 그 기간에도 합법적 보수가 매우 적은 직책에서 해임되는 것이, 공금이나 회사 자금의 직접적인 부정이나 횡령을 제외한 어떤 과실에 대해서든 위원이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처벌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그가 그 밖에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일에 지속적이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강제할 만큼 충분히 무거운 동기가 결코 될 수 없다. 위원회는 기니 해안의 케이프코스트성(Cape Coast Castle)을 수리하기 위해 잉글랜드에서 벽돌과 돌을 보냈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 일을 위해 의회는 여러 차례 특별 자금을 승인했다. 게다가 그렇게 긴 항해로 보낸 그 벽돌과 돌은 품질이 매우 나빠서, 그것으로 수리한 벽을 기초부터 다시 쌓아야 했다고 한다. 루주곶 북쪽에 있는 요새와 수비대는 국가의 비용으로 유지될 뿐 아니라 행정권의 직접 통치 아래 있다. 그런데 그 곶의 남쪽에 있으며, 적어도 일부는 역시 국가의 비용으로 유지되는 요새와 수비대가 왜 다른 통치 아래 있어야 하는지, 그 타당한 이유를 상상하기조차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지중해 무역의 보호가 지브롤터와 미노르카 수비대의 원래 목적 또는 구실이었다. 그리고 그 수비대의 유지와 통치는 매우 적절하게도 언제나 튀르키예 회사가 아니라 행정권에 맡겨져 왔다. 그 권력의 자존심과 위엄은 상당 부분 그 지배 영역의 크기에 있으며, 그것은 그 지배 영역의 방위에 필요한 것에 주의를 소홀히 할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다. 그래서 지브롤터와 미노르카의 수비대는 결코 방치된 적이 없다. 미노르카는 두 번 함락되었고 지금은 아마 영원히 잃었겠지만, 그 재난이 행정권의 어떤 태만 탓으로 돌려진 적은 없다. 그러나 나는 그 비용이 많이 드는 수비대 가운데 어느 것이든 그것이 원래 에스파냐 왕국에서 떼어 내진 목적에 조금이라도 필요했던 적이 있다고 넌지시 말하려는 것으로 이해되고 싶지 않다. 그 분할은 아마 잉글랜드에게서 그 자연적 동맹자인 에스파냐 국왕을 멀어지게 하고, 부르봉 가문의 두 주요 분가를 혈연의 유대가 결코 결합시킬 수 없었을 만큼 훨씬 긴밀하고 영속적인 동맹으로 결합시킨 것 외에는 아무런 실질적 목적에도 이바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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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특허장이나 의회 법으로 설립된 합자회사는 규제 회사와도, 사적 조합(copartnery)과도 여러 면에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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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사적 조합에서는 어떤 조합원도 조합의 동의 없이는 자기 지분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거나 새 조합원을 조합에 들일 수 없다. 그러나 각 조합원은 적절한 예고를 하고 조합에서 탈퇴하여 공동 자본 가운데 자기 지분의 지급을 조합에 요구할 수 있다. 반대로 합자회사에서는 어떤 회원도 자기 지분의 지급을 회사에 요구할 수 없다. 그러나 각 회원은 다른 회원들의 동의 없이 자기 지분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고, 그로써 새 회원을 들일 수 있다. 공동 자본의 지분 가치는 언제나 그것이 시장에서 받을 가격이며, 이는 그 소유자가 회사 자본에 대해 장부상 기재된 금액보다 어떤 비율로든 크거나 작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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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사적 조합에서는 각 조합원이 조합이 진 부채에 대해 자기 재산 전부를 한도로 책임을 진다. 반대로 합자회사에서는 각 조합원이 자기 지분의 한도로만 책임을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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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자회사의 무역은 언제나 이사회가 운영한다. 물론 이 이사회는 흔히 여러 면에서 주주 총회의 통제를 받는다. 그러나 이 주주들의 대부분은 회사의 업무에 대해 무엇이든 안다고 주장하는 일이 드물며, 마침 그들 사이에 파벌 정신이 우세하지 않을 때는 그것에 대해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이사들이 적절하다고 여기는 반년 또는 1년마다의 배당을 만족하여 받는다. 이처럼 한정된 금액을 넘어서는 수고와 위험에서 완전히 면제된다는 점이, 어떤 사적 조합에도 결코 자기 재산을 걸지 않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합자회사에 출자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므로 그런 회사들은 대개 어떤 사적 조합도 자랑할 수 없는 훨씬 큰 자본을 끌어들인다. 남해 회사(South Sea company)의 영업 자본은 한때 3,380만 파운드 이상에 달했다. 잉글랜드 은행의 배당 자본은 현재 1,078만 파운드에 달한다. 그러나 그런 회사의 이사들은 자기 돈이라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돈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므로, 사적 조합의 조합원들이 흔히 자기 돈을 지키는 것과 같은 염려스러운 경계심으로 그 돈을 지키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부자의 집사처럼 그들은 작은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주인의 체면에 맞지 않는다고 여기기 쉬우며, 아주 쉽게 그 주의를 면제받는다. 그러므로 그런 회사의 업무 관리에는 언제나 많든 적든 태만과 낭비가 만연할 수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대외무역을 위한 합자회사는 개인 모험 상인들과의 경쟁을 버텨 낼 수 있었던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그들은 독점적 특권 없이는 성공한 경우가 매우 드물고, 그것이 있어도 흔히 성공하지 못했다. 독점적 특권이 없을 때 그들은 대개 무역을 잘못 운영했다. 독점적 특권이 있을 때 그들은 무역을 잘못 운영하고 제한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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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아프리카 회사의 전신인 왕립 아프리카 회사(Royal African company)는 특허장으로 독점적 특권을 가졌다. 그러나 그 특허장은 의회 법으로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혁명 직후 권리 선언의 결과 그 무역은 국왕 폐하의 모든 신민에게 개방되었다. 허드슨만 회사(Hudson's Bay company)는 법적 권리에 관해 왕립 아프리카 회사와 같은 처지에 있다. 그들의 독점 특허장은 의회 법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남해 회사는 무역 회사로 존속하는 동안 의회 법으로 확인된 독점적 특권을 가졌으며, 현재의 동인도 무역 상인 연합 회사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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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 아프리카 회사는 곧 자기들이 개인 모험 상인들과의 경쟁을 버텨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권리 선언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그 상인들을 무허가 침입자(interlopers)라고 부르며 그렇게 박해했다. 그러나 1698년 개인 모험 상인들은 그들 무역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10퍼센트의 세금을 내게 되었으며, 그 세금은 회사가 요새와 수비대를 유지하는 데 쓰였다. 그러나 이 무거운 세금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여전히 경쟁을 버텨 낼 수 없었다. 그들의 자본과 신용은 점차 쇠퇴했다. 1712년 그들의 부채는 매우 커져서, 그들의 안전과 그 채권자들의 안전을 위해 특별한 의회 법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그 법은 채권자들 가운데 수와 금액에서 3분의 2의 결의가, 회사에 부채 상환을 위해 허용할 기한에 관해서도, 그 부채에 관해 회사와 맺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다른 어떤 약정에 관해서도 나머지 채권자들을 구속한다고 규정했다. 1730년 그들의 업무는 매우 큰 혼란에 빠져, 그들이 설립된 유일한 목적이자 구실인 요새와 수비대의 유지를 전혀 할 수 없게 되었다. 그해부터 최종 해산될 때까지 의회는 그 목적을 위해 연 1만 파운드를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1732년 그들은 여러 해 동안 흑인을 서인도로 운송하는 무역에서 손실을 본 끝에 마침내 그것을 완전히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해안에서 사들인 흑인을 아메리카와 무역하는 개인 상인들에게 팔고, 그들의 사용인들을 사금, 상아, 염료 등을 위한 아프리카 내륙 지방과의 무역에 쓰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더 한정된 무역에서의 성공도 예전의 넓은 무역에서보다 크지 않았다. 그들의 업무는 계속 점차 쇠퇴하여, 마침내 모든 면에서 파산한 회사가 되자 의회 법으로 해산되었고, 그들의 요새와 수비대는 현재의 아프리카 무역 상인 규제 회사에 귀속되었다. 왕립 아프리카 회사가 세워지기 전에 아프리카 무역을 위해 세 개의 다른 합자회사가 차례로 설립되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이 실패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독점 특허장을 가졌으며, 그것은 의회 법으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실질적인 독점적 특권을 부여한다고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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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만 회사는 지난 전쟁에서 불운을 겪기 전에는 왕립 아프리카 회사보다 훨씬 운이 좋았다. 그들의 필요 경비는 훨씬 적다. 그들이 요새라는 이름으로 높여 부르는 여러 거류지와 거처에서 부양하는 사람의 총수는 120명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인원은 배에 실을 모피와 다른 재화의 화물을 미리 준비하기에 충분하다. 그 배들은 얼음 때문에 그 바다에 6주나 8주 이상 머물 수 있는 경우가 드물다. 화물을 미리 준비해 둔다는 이 이점은 여러 해 동안 개인 모험 상인들이 얻을 수 없었으며, 그것 없이는 허드슨만과 무역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 같다. 게다가 11만 파운드를 넘지 않는다고 하는 회사의 적당한 자본은, 그들의 특허장에 포함된 비참하지만 광대한 지역의 무역과 잉여 생산물의 전부, 또는 거의 전부를 독차지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 개인 모험 상인도 그들과 경쟁하여 그 지역과 무역하려 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 회사는 법적으로는 그럴 권리가 없을지 모르지만 사실상 언제나 독점 무역을 누려 왔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이 회사의 적당한 자본은 매우 적은 수의 주주에게 나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적은 수의 주주와 적당한 자본으로 이루어진 합자회사는 사적 조합의 성격에 매우 가까워지며, 거의 같은 정도의 경계와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여러 이점의 결과 허드슨만 회사가 지난 전쟁 전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며 무역을 영위할 수 있었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윤이 고(故) 돕스(Dobbs)가 상상한 것에 근접한 적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훨씬 더 냉정하고 현명한 저자인 『상업의 역사적·연대기적 연역』의 저자 앤더슨(Anderson)은 매우 정당하게 이렇게 지적한다. 돕스 자신이 여러 해에 걸친 그들의 수출입에 관해 제시한 계정을 검토하고, 그들의 특별한 위험과 비용을 적절히 감안하면, 그들의 이윤이 부러워할 만하다거나 무역의 통상 이윤을 조금이라도 크게 넘을 수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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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회사는 유지해야 할 요새나 수비대가 전혀 없었으므로, 대외무역을 위한 다른 합자회사들이 지는 큰 비용 하나를 완전히 면제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막대한 수의 주주에게 나뉜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업무 관리 전체에 어리석음과 태만과 낭비가 만연하리라는 것은 자연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들의 주식 투기 계획의 사기와 무절제는 충분히 알려져 있으며,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지금의 주제와 무관할 것이다. 그들의 상업 계획도 그다지 더 잘 운영되지 않았다. 그들이 처음 종사한 무역은 에스파냐령 서인도에 흑인을 공급하는 무역이었는데, 그들은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그들에게 부여된 이른바 아시엔토 계약(Assiento Contract)의 결과) 그 독점적 특권을 가졌다. 그러나 그 전에 같은 조건으로 그 무역을 누렸던 포르투갈 회사와 프랑스 회사가 모두 그것으로 파산했으므로, 이 무역으로 많은 이윤을 얻으리라고는 기대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보상으로 그들은 해마다 일정한 적재량의 배 한 척을 보내 에스파냐령 서인도와 직접 무역하도록 허락받았다. 이 연례 선박이 허락받은 열 번의 항해 가운데, 그들은 1731년 로열 캐롤라인호의 항해 한 번으로 상당한 이득을 보았고, 나머지 거의 모든 항해에서는 많든 적든 손실을 보았다고 한다. 그들의 대리인과 중개인은 그 실패를 에스파냐 정부의 착취와 억압 탓으로 돌렸지만, 그것은 아마 주로 바로 그 대리인과 중개인의 낭비와 약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일부는 단 1년 만에 큰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1734년 회사는 그 연례 선박으로 얻는 이윤이 적다는 이유로 그 무역과 적재 톤수를 처분하고, 에스파냐 국왕에게서 얻을 수 있는 등가물을 받아들이게 해 달라고 국왕에게 청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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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년 이 회사는 포경업에 착수했다. 물론 그들은 이것에 대해 아무런 독점권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영위하는 동안 다른 어떤 브리튼 신민도 그것에 종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의 배가 그린란드로 한 여덟 번의 항해 가운데, 그들은 한 번 이득을 보았고 나머지는 모두 손실을 보았다. 여덟째이자 마지막 항해 뒤, 배와 물자와 기구를 모두 팔고 보니, 이 부문에서의 전체 손실은 원금과 이자를 합쳐 23만 7천 파운드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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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2년 이 회사는 전부 정부에 대여된 3,380만 파운드가 넘는 막대한 자본을 두 개의 같은 부분으로 나누게 해 달라고 의회에 청원했다. 그 절반, 곧 1,690만 파운드 이상은 다른 정부 연금과 같은 지위에 두어 회사 이사들이 상업 계획을 추진하면서 진 부채나 입은 손실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고, 나머지 절반은 이전처럼 영업 자본으로 남겨 그 부채와 손실의 대상이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 청원은 너무나 합리적이어서 승인되지 않을 수 없었다. 1733년 그들은 다시 의회에 청원하여, 영업 자본의 4분의 3을 연금 자본으로 바꾸고 4분의 1만을 영업 자본으로, 곧 이사들의 잘못된 운영에서 생기는 위험에 노출된 자본으로 남기게 해 달라고 했다. 이때쯤 그들의 연금 자본과 영업 자본은 정부로부터의 여러 차례 상환으로 각각 200만 파운드 이상 줄어 있었으므로, 이 4분의 1은 366만 2,784파운드 8실링 6펜스에 불과했다. 1748년 아시엔토 계약에 따른 회사의 에스파냐 국왕에 대한 모든 청구권은 엑스라샤펠(Aix-la-Chapelle) 조약으로 등가물이라고 여겨진 것과 맞바꾸어 포기되었다. 에스파냐령 서인도와의 무역은 끝났고, 영업 자본의 나머지는 연금 자본으로 바뀌었으며, 회사는 모든 면에서 무역 회사이기를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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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해야 할 것은, 남해 회사가 연례 선박으로 영위한 무역—그들이 상당한 이윤을 얻으리라고 기대된 유일한 무역—에서 그들은 외국 시장에서도 국내 시장에서도 경쟁자가 없지 않았다는 점이다. 카르타헤나, 포르토벨로, 베라크루스에서 그들은 카디스에서 그 시장들로 그들 배의 출항 화물과 같은 종류의 유럽 재화를 가져온 에스파냐 상인들의 경쟁에 부딪혀야 했다. 그리고 잉글랜드에서는 카디스에서 그들 배의 귀항 화물과 같은 종류의 에스파냐령 서인도 재화를 수입한 잉글랜드 상인들의 경쟁에 부딪혀야 했다. 물론 에스파냐 상인과 잉글랜드 상인의 재화는 아마 더 높은 관세를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회사 사용인들의 태만, 낭비, 부정으로 생긴 손실은 아마 그 모든 관세보다 훨씬 무거운 세금이었을 것이다. 개인 모험 상인들이 어떤 종류든 공개적이고 공정한 경쟁에 나설 수 있을 때 합자회사가 대외무역의 어느 부문이든 성공적으로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경험에 어긋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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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는 1600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특허장으로 설립되었다. 그들이 인도로 보낸 처음 열두 번의 항해에서 그들은 회사의 공동 선박만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각자 별도의 자본으로 규제 회사로서 무역한 것 같다. 1612년 그들은 하나의 공동 자본으로 통합했다. 그들의 특허장은 독점적이었으며, 의회 법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그 시절에는 실질적인 독점적 특권을 부여한다고 여겨졌다. 그러므로 여러 해 동안 그들은 무허가 침입자들에게 그다지 방해받지 않았다. 그들의 자본은 74만 4천 파운드를 넘은 적이 없고 1주가 50파운드였으므로, 심한 태만과 낭비의 구실이나 심한 부정의 은신처가 될 만큼 과도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거래가 그만큼 넓지도 않았다. 일부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악의로, 일부는 다른 사고로 생긴 몇 차례의 특별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러 해 동안 성공적인 무역을 영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자유의 원리가 더 잘 이해되자, 의회 법으로 확인되지 않은 국왕 특허장이 어디까지 독점적 특권을 부여할 수 있는지가 날마다 점점 더 의심스러워졌다. 이 문제에 관한 법원의 판결은 일관되지 않았고, 정부의 권위와 시대의 기분에 따라 달라졌다. 무허가 침입자들이 늘어났고, 찰스 2세 치세 말엽, 제임스 2세 치세 전체, 그리고 윌리엄 3세 치세 일부 동안 그들을 큰 곤경에 빠뜨렸다. 1698년 의회에, 출자자들을 독점적 특권을 가진 새 동인도 회사로 설립해 준다면 정부에 8퍼센트로 200만 파운드를 대여하겠다는 제안이 나왔다. 옛 동인도 회사는 같은 조건으로 자기 자본과 거의 같은 금액인 70만 파운드를 4퍼센트로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공공 신용의 상태가 어떠했던지, 정부로서는 70만 파운드를 4퍼센트로 빌리는 것보다 200만 파운드를 8퍼센트로 빌리는 것이 더 편리했다. 새 출자자들의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그 결과 새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옛 동인도 회사는 1701년까지 무역을 계속할 권리가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자기네 회계 담당자의 이름으로 매우 교묘하게 새 회사의 자본에 31만 5천 파운드를 출자했다. 동인도 무역을 이 200만 파운드 대여금의 출자자들에게 부여한 의회 법의 문구가 소홀했기 때문에, 그들이 모두 하나의 공동 자본으로 통합해야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출자액이 7,200파운드에 불과한 몇몇 개인 상인들은 자기 자본으로 자기 위험 부담 아래 따로 무역할 특권을 고집했다. 옛 동인도 회사는 1701년까지 자기 자본으로 따로 무역할 권리가 있었고, 그 시기 전후에 걸쳐 다른 개인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새 회사의 자본에 출자한 31만 5천 파운드로 따로 무역할 권리도 있었다. 두 회사가 개인 상인들과, 그리고 서로 경쟁한 것이 두 회사를 거의 파멸시켰다고 한다. 나중에 1750년, 무역을 규제 회사의 관리 아래 두어 어느 정도 개방하자는 제안이 의회에 나왔을 때, 동인도 회사는 이 제안에 반대하면서, 그들이 생각하기에 당시 이 경쟁이 낳은 비참한 결과를 매우 강한 말로 묘사했다. 인도에서는 그것이 재화의 가격을 너무 높여서 살 가치가 없게 만들었고, 잉글랜드에서는 시장에 공급을 넘치게 하여 가격을 너무 낮추어 아무런 이윤도 얻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더 풍부한 공급으로 공공에 큰 이익과 편익을 주면서 그것이 잉글랜드 시장에서 인도 재화의 가격을 크게 낮추었으리라는 것은 거의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인도 시장에서 가격을 크게 높였으리라는 것은 그다지 개연성이 없어 보인다. 그 경쟁이 일으킬 수 있었던 모든 특별 수요는 인도 상업이라는 광대한 바다의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요의 증가는 처음에는 때로 재화의 가격을 올릴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반드시 그것을 낮춘다. 그것은 생산을 장려하고, 그로써 생산자들 사이의 경쟁을 늘리며, 생산자들은 서로보다 싸게 팔기 위해 그렇지 않았다면 생각도 하지 않았을 새로운 분업과 새로운 기술 개량에 의존한다. 회사가 불평한 비참한 결과는 소비의 저렴함과 생산에 주어진 장려였다. 바로 정치경제학의 큰 임무가 증진하려는 두 가지 효과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토록 슬프게 묘사한 경쟁은 오래 계속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1702년 두 회사는 여왕을 셋째 당사자로 하는 3자 계약서로 어느 정도 통합되었고, 1708년에는 의회 법으로 현재의 이름인 '동인도 무역 상인 연합 회사(United Company of Merchants trading to the East Indies)'라는 하나의 회사로 완전히 합병되었다. 이 법에는 개별 상인들이 1711년 미가엘 축일까지 무역을 계속하도록 허용하되, 동시에 이사들이 3년 전에 예고하고 그들의 7,200파운드라는 작은 자본을 상환하여 회사의 전체 자본을 하나의 공동 자본으로 만들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조항을 넣을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다. 같은 법으로 정부에 대한 새 대여의 결과 회사의 자본은 200만 파운드에서 320만 파운드로 늘었다. 1743년 회사는 정부에 다시 100만 파운드를 대여했다. 그러나 이 100만 파운드는 주주들에게 납입을 요구해서가 아니라 연금을 팔고 사채(社債)를 발행해서 조달한 것이었으므로, 주주들이 배당을 청구할 수 있는 자본을 늘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영업 자본을 늘렸다. 그것도 다른 320만 파운드와 마찬가지로 회사가 상업 계획을 추진하면서 입은 손실과 진 부채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1708년부터, 또는 적어도 1711년부터 이 회사는 모든 경쟁자에게서 벗어나 동인도에 대한 잉글랜드 상업의 독점을 완전히 확립하고 성공적인 무역을 영위했으며, 그 이윤으로 해마다 주주들에게 적당한 배당을 했다. 1741년에 시작된 프랑스와의 전쟁 동안, 퐁디셰리의 프랑스 총독 뒤플렉스(Dupleix)의 야심이 그들을 카르나티크(Carnatic)의 전쟁과 인도 군주들의 정치에 끌어들였다. 여러 차례의 눈부신 승리와 그만큼 눈부신 패배 끝에, 그들은 마침내 당시 인도에서 그들의 주요 거류지였던 마드라스를 잃었다. 그것은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그들에게 반환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 전쟁과 정복의 정신이 인도의 회사 사용인들을 사로잡은 것 같으며, 그 이후로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은 것 같다. 1755년에 시작된 프랑스와의 전쟁 동안 그들의 군대는 그레이트브리튼 군대의 전반적인 행운을 함께 누렸다. 그들은 마드라스를 방어하고, 퐁디셰리를 점령하고, 캘커타를 탈환했으며, 당시 연 300만 파운드 이상에 달한다고 일컬어진 부유하고 광대한 영토의 수입을 얻었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이 수입을 조용히 소유했다. 그러나 1767년 행정부는 그들의 영토 획득물과 그로부터 생기는 수입이 당연히 왕실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회사는 이 주장에 대한 보상으로 정부에 연 40만 파운드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그 전에 그들은 배당을 약 6퍼센트에서 10퍼센트로 점차 늘렸다. 곧 320만 파운드의 자본에 대해 배당을 12만 8천 파운드 늘려, 연 19만 2천 파운드에서 32만 파운드로 올렸던 것이다. 이 무렵 그들은 그것을 더욱 올려 12.5퍼센트로 하려 했는데, 그렇게 되면 주주들에 대한 연간 지급액이 그들이 정부에 해마다 지급하기로 합의한 금액, 곧 연 40만 파운드와 같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의 합의가 시행되기로 한 2년 동안, 연속된 두 의회 법으로 그들은 배당을 더 늘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 법의 목적은 당시 600만이나 700만 파운드가 넘는다고 추정된 그들의 부채 상환을 더 빨리 진척시키도록 하는 것이었다. 1769년 그들은 정부와의 합의를 5년 더 갱신하고, 그 기간 동안 배당을 점차 12.5퍼센트까지 늘리도록 허용받되, 1년에 1퍼센트 넘게는 결코 늘리지 않기로 약정했다. 그러므로 이 배당 증가는 최고에 이르렀을 때에도 주주와 정부에 대한 그들의 연간 지급액을 합쳐서 최근의 영토 획득 이전보다 68만 파운드만큼 늘릴 수 있을 뿐이었다. 그 영토 획득물의 총수입이 얼마로 여겨졌는지는 이미 언급했다. 그리고 1769년 동인도 무역선 크루튼던(Cruttenden)호가 가져온 계정에 따르면, 모든 공제와 군사비를 뺀 순수입은 204만 8,747파운드로 기재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일부는 토지에서, 그러나 주로 여러 거류지에 설치된 관세에서 생기는 또 다른 수입 43만 9천 파운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의 무역 이윤은 하원에서 한 의장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적어도 연 40만 파운드, 회계 담당자의 증언에 따르면 적어도 50만 파운드, 가장 낮은 계산으로도 주주들에게 지급될 최고 배당과 적어도 같았다. 그렇게 큰 수입이라면 연간 지급액을 68만 파운드 늘리고도, 동시에 부채를 빨리 줄이기에 충분한 큰 감채기금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1773년 그들의 부채는 줄기는커녕 늘었다. 40만 파운드 지급에서 국고에 대한 체납, 미납 관세로 인한 세관에 대한 체납, 차입금으로 인한 은행에 대한 큰 부채, 그리고 넷째로 인도에서 그들 앞으로 발행되어 무분별하게 인수된 120만 파운드가 넘는 어음 때문이었다. 이 누적된 청구가 그들에게 가져온 곤경 때문에 그들은 배당을 단번에 6퍼센트로 줄였을 뿐 아니라, 정부의 자비에 몸을 맡기고 첫째로 약정된 연 40만 파운드의 추가 지급 면제를, 둘째로 당장의 파산을 면하기 위한 140만 파운드의 대여를 탄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재산의 큰 증가는, 그 재산 증가에 비례하는 것 이상으로, 사용인들에게 더 큰 낭비의 구실과 더 큰 부정의 은신처를 제공하는 데만 이바지한 것 같다. 인도에서의 사용인들의 행동과 인도와 유럽에서의 그들 업무의 전반적 상태가 의회 조사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본국과 해외 양쪽에서 그들의 통치 구조에 몇 가지 매우 중요한 변경이 이루어졌다. 인도에서는 그 전에 서로 완전히 독립되어 있던 마드라스, 봄베이, 캘커타의 주요 거류지들이 네 명의 보좌관으로 이루어진 참사회의 보좌를 받는 총독(governor-general) 아래 두어졌다. 의회는 이 총독과 참사회의 최초 임명권을 스스로 가졌으며, 그들은 캘커타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 도시는 이제 예전의 마드라스처럼 인도에서 잉글랜드 거류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그 도시와 인근에서 생기는 상사 사건을 재판하기 위해 설치된 캘커타 시장 법원은 제국의 확장과 함께 점차 그 관할을 넓혀 왔다. 그것은 이제 축소되어 그 설치의 원래 목적에 국한되었다. 그 대신 왕실이 임명하는 수석 재판관 한 명과 재판관 세 명으로 이루어진 새 최고 법원이 설치되었다. 유럽에서는 주주가 총회에서 투표할 자격을 얻는 데 필요한 요건이 회사 자본의 1주의 원래 가격인 500파운드에서 1천 파운드로 높아졌다. 또한 이 요건으로 투표하려면, 그것을 상속이 아니라 자기 매입으로 얻은 경우, 이전에 필요했던 6개월 대신 적어도 1년 동안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선언되었다. 24명의 이사회는 그 전에는 해마다 선출되었지만, 이제는 각 이사를 앞으로 4년 임기로 선출하되, 그 가운데 여섯 명은 해마다 교대로 퇴임하며 이듬해의 새 이사 여섯 명 선거에서 재선될 수 없다고 규정되었다. 이 변경의 결과 주주 총회와 이사회 모두 이전에 흔히 그랬던 것보다 더 위엄 있고 착실하게 행동할 가능성이 크리라고 기대되었다. 그러나 어떤 변경으로도 그 회의체들을 어떤 면에서든 대제국을 통치하거나, 그 통치에 참여하기에조차 적합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다. 그 구성원의 대부분은 언제나 그 제국의 번영에 너무 적은 이해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어서, 그것을 증진할 수 있는 것에 진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큰 재산을 가진 사람이, 때로는 작은 재산을 가진 사람조차, 오로지 주주 총회에서의 투표권으로 얻으리라 기대하는 영향력 때문에 1천 파운드어치의 동인도 회사 주식을 사려 한다. 그것은 그에게 인도의 약탈물은 아니더라도 인도 약탈자의 임명에 대한 몫을 준다. 이사회가 그 임명을 하지만, 이사회는 필연적으로 많든 적든 주주들의 영향 아래 있다. 주주들은 그 이사들을 선출할 뿐 아니라 때로는 인도의 사용인 임명을 뒤엎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가 몇 년 동안 이 영향력을 누리고 그로써 일정 수의 친구들을 챙겨 줄 수 있다면, 그는 흔히 배당에 대해서도, 심지어 자기 투표권의 기초인 주식의 가치에 대해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 투표권이 그에게 통치의 몫을 주는 대제국의 번영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저항할 수 없는 도덕적 원인 때문에 그런 상업 회사의 주주 대부분이 그러하고 또 필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것만큼, 자기 신민의 행복이나 불행, 자기 영토의 개량이나 황폐, 자기 행정의 영광이나 치욕에 대해 그토록 완전히 무관심했던 군주는 결코 없었고, 사물의 본성상 결코 있을 수도 없다. 또한 이 무관심은 의회 조사의 결과 만들어진 새 규정 가운데 일부로 줄기보다는 늘어날 가능성이 컸다. 예컨대 하원의 한 결의에서, 정부가 회사에 대여한 140만 파운드가 상환되고 그들의 사채가 150만 파운드로 줄어들면 그때,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자본에 대해 8퍼센트를 배당할 수 있으며, 본국에서 그들의 수입과 순이윤 가운데 남는 것은 무엇이든 네 부분으로 나누어, 그 셋은 공공의 용도를 위해 국고에 납입하고 넷째는 사채의 추가 감축이나 회사가 겪을 수 있는 다른 우발적 위급 사태의 처리를 위한 기금으로 적립해야 한다고 선언되었다. 그러나 회사가 순수입과 이윤 전부가 자기 것이고 자기 처분에 맡겨져 있을 때에도 나쁜 관리인이자 나쁜 군주였다면, 그 4분의 3이 다른 사람들의 것이 되고 나머지 4분의 1은 회사의 혜택을 위해 쓰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감독 아래 그들의 승인을 받아 쓰이게 될 때, 그들이 더 나아질 가능성은 확실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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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로서는 제안된 8퍼센트의 배당을 지급하고 남는 잉여가 무엇이든, 그 결의로 자기들과 어느 정도 불화하지 않을 수 없는 한 무리의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기보다는, 자기 사용인과 종속자들이 그것을 낭비하는 즐거움이나 횡령하는 이득을 누리는 편이 더 마음에 들 것이다. 그 사용인과 종속자들의 이익은 주주 총회에서 때로 총회 자신의 권위를 정면으로 침해하며 저질러진 약탈의 장본인들을 지지하도록 총회를 기울게 할 만큼 우세할 수도 있다. 주주의 다수에게는 자기 총회의 권위를 지지하는 것조차 때로는 그 권위를 무시한 자들을 지지하는 것보다 덜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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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1773년의 규정은 인도에서 회사 통치의 무질서를 끝내지 못했다. 그들은 한때 일시적으로 선정을 베풀어 캘커타의 국고에 300만 파운드 이상을 모았고, 그 뒤 인도에서 가장 부유하고 비옥한 나라들 가운데 일부를 광대하게 추가하여 그들의 지배나 약탈을 넓혔는데도, 모든 것이 낭비되고 파괴되었다. 그들은 하이데르 알리(Hyder Ali)의 침입을 막거나 저항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무질서의 결과 회사는 지금(1784년) 그 어느 때보다 큰 곤경에 처해 있으며, 당장의 파산을 막기 위해 다시 한번 정부의 도움을 탄원하는 처지가 되었다. 의회의 여러 당파가 그 업무를 더 잘 관리하기 위한 여러 계획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계획은 실로 언제나 충분히 분명했던 것, 곧 회사가 그 영토 소유지를 통치하기에 완전히 부적합하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일치하는 것 같다. 회사 자신조차 그만큼은 자기의 무능을 확신하는 것 같으며, 그런 까닭에 그 영토를 정부에 넘겨줄 용의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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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떨어진 미개한 나라들에 요새와 수비대를 소유할 권리에는 필연적으로 그 나라들에서 강화와 전쟁을 할 권리가 결부되어 있다. 한쪽 권리를 가진 합자회사들은 끊임없이 다른 쪽 권리도 행사해 왔으며, 흔히 그 권리를 명시적으로 부여받았다. 그들이 그것을 대개 얼마나 부당하게, 얼마나 변덕스럽게, 얼마나 잔혹하게 행사했는지는 최근의 경험으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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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의 회사가 자기 위험과 비용으로 어떤 멀고 미개한 국민과 새로운 무역을 개척하려 할 때, 그들을 합자회사로 법인화하고 성공할 경우 일정 연수 동안 그 무역의 독점권을 주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공공이 나중에 그 혜택을 거두게 될 위험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실험에 그들이 모험을 건 데 대해 국가가 보상할 수 있는 가장 쉽고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이런 종류의 일시적 독점은 새 기계에 대한 같은 독점을 그 발명자에게, 새 책에 대한 독점을 그 저자에게 주는 것과 같은 원리로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기간이 만료되면 독점은 확실히 끝나야 한다. 요새와 수비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면 그것을 정부가 인수하여 그 가치를 회사에 지급하고, 무역은 국가의 모든 신민에게 개방해야 한다. 영구적 독점으로 국가의 다른 모든 신민은 매우 불합리하게 두 가지 방식으로 과세된다. 첫째로 자유무역의 경우라면 훨씬 싸게 살 수 있는 재화의 높은 가격으로, 둘째로 그들 가운데 많은 이가 영위하는 것이 편리하고 이로울 수 있는 사업 부문에서 완전히 배제됨으로써다. 게다가 그들이 이런 방식으로 과세되는 것은 모든 목적 가운데 가장 무가치한 목적을 위해서다. 그것은 단지 회사가 자기 사용인들의 태만과 낭비와 부정을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 사용인들의 무질서한 행동은 회사의 배당이 완전히 자유로운 무역의 통상 이윤율을 넘는 것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으며, 매우 흔히 그 율에 한참 못 미치게 만든다. 그러나 경험으로 보건대 합자회사는 독점 없이는 대외무역의 어떤 부문도 오래 영위할 수 없는 것 같다. 두 시장 모두에 경쟁자가 많을 때 한 시장에서 사서 다른 시장에서 이윤을 남기고 팔고, 수요의 이따금의 변동뿐 아니라 경쟁, 곧 그 수요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공급의 훨씬 크고 잦은 변동을 지켜보며, 각 재화 구색의 양과 질을 이 모든 사정에 솜씨 있고 분별 있게 맞추는 것은 그 작전이 끊임없이 바뀌는 일종의 전쟁이다. 그리고 그것은 합자회사의 이사들에게서는 오래 기대할 수 없는 끊임없는 경계와 주의 없이는 성공적으로 수행되기 어렵다. 동인도 회사는 그들의 기금이 상환되고 독점적 특권이 만료되면, 의회 법에 따라 공동 자본을 가진 법인으로 존속하며 다른 동료 신민들과 함께 법인 자격으로 동인도와 무역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처지에서는 개인 모험 상인의 더 큰 경계와 주의가 아마 곧 그들로 하여금 그 무역에 싫증 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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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 문제에 깊은 지식을 지닌 저명한 프랑스 저자 모를레 신부(Abbe Morellet)는 1600년 이래 유럽 여러 지역에 설립된 대외무역을 위한 합자회사 55개의 목록을 제시하는데, 그에 따르면 그 회사들은 독점적 특권을 가졌는데도 모두 잘못된 운영으로 실패했다. 그는 그 가운데 두세 회사의 역사에 관해서는 잘못된 정보를 얻었는데, 그 회사들은 합자회사가 아니었고 실패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대신 실패했는데도 그가 빠뜨린 합자회사가 여럿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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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자회사가 독점적 특권 없이도 성공적으로 영위할 수 있을 것 같은 유일한 사업은, 그 모든 작업을 이른바 정해진 일과(routine), 곧 변동의 여지가 거의 또는 전혀 없는 균일한 방법으로 환원할 수 있는 사업이다. 이런 종류의 사업으로는 첫째로 은행업, 둘째로 화재와 해상 위험 및 전시 나포에 대한 보험업, 셋째로 항행 가능한 수로나 운하를 만들고 유지하는 사업, 넷째로 대도시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물을 끌어오는 비슷한 사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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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업의 원리는 다소 난해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실무는 엄격한 규칙으로 환원할 수 있다. 특별한 이득에 대한 어떤 솔깃한 투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든 그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렇게 하려는 은행 회사에 거의 언제나 지극히 위험하며 흔히 치명적이다. 그런데 합자회사의 구조는 대체로 그 회사를 어떤 사적 조합보다 확립된 규칙을 더 고수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런 회사는 이 사업에 지극히 잘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유럽의 주요 은행 회사들은 합자회사이며, 그 가운데 다수는 아무런 독점적 특권 없이 매우 성공적으로 사업을 운영한다. 잉글랜드 은행은 잉글랜드의 다른 어떤 은행 회사도 여섯 명을 넘는 사람으로 구성될 수 없다는 것 외에는 다른 독점적 특권이 없다. 에든버러의 두 은행은 아무런 독점적 특권이 없는 합자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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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나 해상 손실이나 나포로 인한 위험의 가치는 아마 매우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겠지만, 대략적인 추정은 할 수 있어서 어느 정도 엄격한 규칙과 방법으로 환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보험업은 합자회사가 아무런 독점적 특권 없이도 성공적으로 영위할 수 있다. 런던 보험 회사(London Assurance)도 왕립 거래소 보험 회사(Royal Exchange Assurance)도 그런 특권을 갖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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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행 가능한 수로나 운하는 일단 만들어지면 그 관리가 매우 단순하고 쉬워지며, 엄격한 규칙과 방법으로 환원할 수 있다. 그것을 만드는 일조차 그러하다. 1마일당 얼마, 갑문 하나당 얼마로 청부업자와 계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도시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운하, 수도교, 또는 큰 수도관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사업은 합자회사가 아무런 독점적 특권 없이도 매우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으며, 실제로 흔히 그렇게 운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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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단지 합자회사가 어떤 사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업을 위해 합자회사를 설립하거나, 단지 어떤 특정 상인 집단이 면제를 받으면 번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모든 이웃에게 적용되는 일반 법률 가운데 일부에서 면제하는 것은 확실히 합리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설립을 완전히 합리적으로 만들려면, 엄격한 규칙과 방법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사정 외에 두 가지 다른 사정이 함께 갖추어져야 한다. 첫째, 그 사업이 대부분의 일반 사업보다 더 크고 더 일반적인 효용을 지닌다는 것이 가장 분명한 증거로 드러나야 한다. 둘째, 그것이 사적 조합으로 쉽게 모을 수 있는 것보다 큰 자본을 필요로 해야 한다. 적당한 자본으로 충분하다면, 그 사업의 큰 효용은 합자회사를 설립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이 경우 그 사업이 생산할 것에 대한 수요는 개인 모험 상인들이 기꺼이 쉽게 공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네 사업에서는 이 두 사정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60

분별 있게 운영될 때 은행업이 지니는 크고 일반적인 효용은 이 연구의 제2편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그런데 공공 신용을 떠받치고 특별한 위급 시에 아마 수백만 파운드에 달할 조세의 전체 수입을 그것이 들어오기 1, 2년 전에 정부에 선대해야 하는 공립 은행은, 어떤 사적 조합으로도 쉽게 모을 수 있는 것보다 큰 자본을 필요로 한다.

61

보험업은 개인의 재산에 큰 안전을 주며, 한 개인을 파멸시킬 손실을 많은 사람에게 나눔으로써 그것이 사회 전체에 가볍고 쉽게 떨어지게 한다. 그러나 이 안전을 주려면 보험업자가 매우 큰 자본을 가져야 한다. 런던에 보험을 위한 두 합자회사가 설립되기 전, 몇 년 사이에 파산한 개인 보험업자 150명의 명단이 법무장관에게 제출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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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행 가능한 수로와 운하, 그리고 대도시에 물을 공급하는 데 때로 필요한 공사가 크고 일반적인 효용을 지니면서 동시에 흔히 개인의 재산에 맞는 것보다 큰 비용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충분히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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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말한 네 사업을 제외하면, 합자회사의 설립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사정이 모두 갖추어진 다른 사업을 나는 떠올릴 수 없었다. 런던의 잉글랜드 구리 회사, 납 제련 회사, 유리 연마 회사는 그들이 추구하는 대상에 어떤 크거나 특별한 효용이 있다는 구실조차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 대상의 추구가 많은 개인의 재산에 맞지 않는 비용을 필요로 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 회사들이 영위하는 사업이 합자회사의 관리에 적합할 만큼 엄격한 규칙과 방법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 또는 그들이 특별한 이윤을 자랑할 이유가 있는지는 나도 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광산 모험 회사는 오래전에 파산했다. 에든버러의 브리튼 아마포 회사의 주식은 현재 액면가보다 훨씬 낮게 팔리는데, 몇 년 전보다는 덜 낮다. 어떤 특정 제조업을 증진한다는 공익적 목적으로 설립된 합자회사는 자기 업무를 잘못 관리하여 사회의 총자산을 줄이는 것 외에도, 다른 면에서 거의 언제나 이로움보다 해로움을 더 많이 끼친다. 가장 올바른 의도에도 불구하고, 청부업자들이 그들을 오도하고 속이는 제조업의 특정 부문들에 대한 이사들의 불가피한 편애는 나머지 부문들에 실질적인 억제가 되며, 그렇지 않았다면 분별 있는 근로와 이윤 사이에 저절로 확립되었을 자연스러운 비례를 많든 적든 필연적으로 깨뜨린다. 그 비례야말로 나라의 일반 산업에 대한 모든 장려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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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항 청소년 교육을 위한 기관의 경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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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교육을 위한 기관도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비용을 충당하기에 충분한 수입을 낼 수 있다. 학생이 교사에게 내는 수업료나 사례금이 자연히 이런 종류의 수입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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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보수가 전적으로 이 자연적 수입에서 나오지 않는 경우에도, 그것이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 징수와 사용이 행정권에 맡겨져 있는 사회의 일반 수입에서 나와야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유럽의 대부분 지역에서 학교와 대학의 기본재산은 그 일반 수입에 아무런 부담도 지우지 않거나 매우 작은 부담만 지운다. 그것은 어디서나 주로 어떤 지방 또는 주의 수입, 곧 어떤 토지 재산의 지대나 어떤 금액의 이자에서 나오며, 그것은 때로는 군주 자신이, 때로는 어떤 개인 기부자가 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배정하여 수탁자의 관리 아래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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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공적 기본재산이 일반적으로 그 설립 목적을 증진하는 데 기여했는가? 그것이 교사의 근면을 장려하고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는가? 그것이 교육의 방향을, 저절로 자연히 향했을 대상보다 개인과 공공 모두에게 더 유용한 대상으로 이끌었는가? 이 질문 각각에 적어도 개연성 있는 대답을 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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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직업에서든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 대부분의 노력은 언제나 그들이 그 노력을 해야 할 필요의 정도에 비례한다. 이 필요는 자기 직업의 보수가 재산, 또는 통상의 수입과 생활 자료조차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인 사람들에게서 가장 크다. 이 재산을 얻거나 이 생활 자료라도 얻으려면, 그들은 1년 동안 알려진 가치의 일정량의 일을 해내야 한다. 그리고 경쟁이 자유로운 곳에서는, 모두 서로를 일자리에서 밀어내려 애쓰는 경쟁자들 사이의 경쟁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어느 정도 정확하게 자기 일을 해내려 애쓰도록 강제한다. 어떤 특정 직업에서 성공으로 얻을 수 있는 목표의 크기는 물론 때로 비상한 기개와 야심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의 노력을 북돋울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노력을 일으키는 데 큰 목표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경쟁과 경쟁심은 비천한 직업에서조차 탁월함을 야망의 대상으로 만들며, 흔히 바로 가장 큰 노력을 일으킨다. 반대로 큰 목표는 그것만으로, 노력의 필요에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상당한 노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던 적이 드물다. 잉글랜드에서 법률 직업의 성공은 몇몇 매우 큰 야망의 대상으로 이어진다. 그런데도 넉넉한 재산을 타고난 사람으로서 이 나라에서 그 직업에 뛰어났던 사람이 얼마나 적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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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대학의 기본재산은 교사들이 노력해야 할 필요를 많든 적든 필연적으로 줄였다. 그들의 생활 자료는 봉급에서 나오는 한, 분명히 각자 직업에서의 그들의 성공과 명성과는 완전히 무관한 기금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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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학에서는 봉급이 교사 보수의 일부, 흔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그 대부분은 학생들의 사례금이나 수업료에서 나온다. 이 경우 노력의 필요는 언제나 많든 적든 줄어들기는 하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여전히 자기 직업에서의 명성이 얼마간 중요하며, 그는 여전히 자기 강의를 들은 사람들의 애정, 감사, 호의적인 평판에 얼마간 의존한다. 그리고 그는 그런 호의적인 감정을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는 것, 곧 자기 직무의 모든 부분을 수행하는 능력과 근면으로써만큼 잘 얻을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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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대학에서는 교사가 학생들에게서 어떤 사례금이나 수업료도 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봉급이 그가 그 직책에서 얻는 수입의 전부를 이룬다. 이 경우 그의 이익은 그의 의무와 가능한 한 정면으로 대립하게 된다. 될 수 있는 한 편안하게 사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이익이다. 그리고 매우 고된 어떤 의무를 수행하든 수행하지 않든 보수가 정확히 같다면, 적어도 이익을 속되게 이해하는 한, 그 의무를 완전히 소홀히 하거나,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어떤 권위에 복종하고 있다면 그 권위가 허용하는 한 될 수 있는 대로 부주의하고 엉성하게 수행하는 것이 확실히 그의 이익이다. 그가 천성적으로 활동적이고 노동을 사랑한다면, 그 활동성을 아무런 이익도 얻을 수 없는 의무의 수행보다는 얼마간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어떤 방식으로든 쓰는 것이 그의 이익이다.

72

그가 복종하는 권위가 그 자신이 구성원인 법인체, 곧 칼리지나 대학에 있고, 그 다른 구성원의 대부분이 그 자신처럼 교사이거나 교사여야 할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공동 전선을 펴서 모두 서로에게 매우 관대하게 굴고, 각자 자기도 자기 의무를 소홀히 하도록 허용받는다면 이웃이 그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에 동의할 가능성이 크다.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공인 교수의 대부분이 여러 해 전부터 가르치는 시늉조차 완전히 그만두었다.

73

그가 복종하는 권위가 그가 구성원인 법인체보다는 다른 어떤 외부 사람들, 예컨대 교구의 주교나 지방의 총독, 또는 아마 어느 국무대신에게 있다면, 이 경우 그가 자기 의무를 완전히 소홀히 하도록 내버려 두어질 가능성은 물론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그런 상급자들이 그에게 강제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일정 시간 학생들을 상대하는 것, 곧 일주일이나 1년에 일정 횟수의 강의를 하는 것뿐이다. 그 강의가 어떤 것이 될지는 여전히 교사의 근면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 근면은 그가 그것을 발휘할 동기에 비례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이런 종류의 외부 관할권은 무지하게, 그리고 변덕스럽게 행사되기 쉽다. 그것은 본성상 자의적이고 재량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교사의 강의를 스스로 듣지도 않고, 아마 그가 가르치는 학문을 이해하지도 못하므로, 그것을 분별 있게 행사할 수 있는 경우가 드물다. 또한 직권의 오만 때문에 그들은 흔히 그것을 어떻게 행사하든 무관심하며, 아무런 정당한 이유 없이 함부로 그를 견책하거나 직책에서 해임하기 매우 쉽다. 그런 관할권에 복종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로써 품위가 떨어지며,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는 대신 가장 비천하고 경멸받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가 언제나 노출되어 있는 부당한 대우로부터 자기를 효과적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강력한 보호에 의해서다. 그리고 그는 이 보호를 자기 직업에서의 능력이나 근면으로써가 아니라, 상급자의 뜻에 아첨하고, 언제나 그 뜻을 위해 자기가 구성원인 법인체의 권리와 이익과 명예를 희생할 태세를 갖춤으로써 얻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프랑스 대학의 행정을 상당한 기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종류의 자의적인 외부 관할권에서 자연히 생기는 결과를 목격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74

교사의 공적이나 명성과 무관하게 일정 수의 학생을 어떤 칼리지나 대학으로 강제로 보내는 것은 무엇이든, 그 공적이나 명성의 필요를 많든 적든 줄이는 경향이 있다.

75

인문학, 법학, 의학, 신학 학위 취득자의 특권은 특정 대학에 일정 연수 거주해야만 얻을 수 있을 때, 교사의 공적이나 명성과 무관하게 일정 수의 학생을 필연적으로 그 대학으로 강제로 보낸다. 학위 취득자의 특권은 일종의 도제법이며, 다른 도제법이 기술과 제조업의 개선에 기여한 것과 꼭 같은 정도로 교육의 개선에 기여했다.

76

장학금, 급비, 학비 보조금 등의 자선 기금은 그 특정 칼리지의 공적과는 완전히 무관하게 일정 수의 학생을 필연적으로 특정 칼리지에 묶어 둔다. 그런 자선 기금을 받는 학생들이 가장 마음에 드는 칼리지를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런 자유는 아마 여러 칼리지 사이에 얼마간의 경쟁심을 일으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반대로 각 칼리지의 독립 구성원조차 떠나려는 칼리지에 먼저 허가를 청하여 얻지 않고는 그곳을 떠나 다른 칼리지로 가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은 그 경쟁심을 크게 꺼뜨리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77

각 칼리지에서 각 학생에게 모든 학예를 가르칠 튜터나 교사를 학생이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않고 칼리지의 장이 임명하며, 태만, 무능, 부당한 대우의 경우에도 학생이 먼저 허가를 청하여 얻지 않고는 그를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없다면, 그런 규정은 같은 칼리지의 여러 튜터 사이의 모든 경쟁심을 크게 꺼뜨릴 뿐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서 각자의 학생에 대한 근면과 주의의 필요를 크게 줄이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런 교사들은 학생들에게서 아주 많은 보수를 받더라도, 학생들에게서 전혀 보수를 받지 않거나 봉급 외에는 다른 보상이 없는 교사들만큼 학생들을 소홀히 하기 쉬울 것이다.

78

교사가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동안 자기가 터무니없는 소리나 그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는 소리를 말하거나 읽고 있다고 의식하는 것은 그에게 불쾌한 일일 것이다. 또한 학생 대부분이 그의 강의를 빼먹거나, 아마 꽤 분명한 소홀과 경멸과 조롱의 기색을 보이며 강의에 출석하는 것을 보는 것도 그에게 불쾌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일정 횟수의 강의를 해야 한다면, 이런 동기만으로도, 다른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어도 그는 그럭저럭 괜찮은 강의를 하려고 얼마간 수고를 기울일 것이다. 그러나 근면을 향한 이 모든 자극의 날을 효과적으로 무디게 할 여러 방편을 생각해 낼 수 있다. 교사는 자기가 가르치려는 학문을 스스로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대신, 그것에 관한 어떤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책이 외국의 사어(死語)로 쓰여 있다면, 그것을 학생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통역해 주거나, 또는 그보다 더 수고를 덜려면 학생들에게 그것을 자기에게 통역하게 하고, 이따금 그것에 대해 한마디씩 논평함으로써, 그는 자기가 강의를 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아주 약간의 지식과 노력만 있으면, 그는 정말로 어리석거나 불합리하거나 우스꽝스러운 말을 하여 경멸이나 조롱을 받는 일 없이 이렇게 할 수 있다. 동시에 칼리지의 규율은 그가 모든 학생에게 이 가짜 강의에 가장 규칙적으로 출석하고, 공연 시간 내내 가장 점잖고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도록 강제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79

칼리지와 대학의 규율은 일반적으로 학생의 혜택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사의 이익, 더 정확히 말하면 교사의 편안함을 위해 고안된다. 그 목적은 모든 경우에 교사의 권위를 유지하고, 그가 자기 의무를 소홀히 하든 수행하든, 학생들이 모든 경우에 그가 그것을 최대의 근면과 능력으로 수행하는 것처럼 그에게 행동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계층에게는 완전한 지혜와 덕을, 다른 계층에게는 최대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전제하는 것 같다. 그러나 교사들이 실제로 자기 의무를 수행하는 곳에서 학생의 대부분이 자기 의무를 소홀히 한 예는 없다고 나는 믿는다. 정말로 들을 가치가 있는 강의에 출석하게 하는 데는 어떤 규율도 필요하지 않다. 그런 강의가 이루어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어린아이나 아주 어린 소년이 인생의 그 이른 시기에 습득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교육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려면 어느 정도의 강제와 구속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열두세 살이 지나면, 교사가 자기 의무를 다하기만 한다면, 교육의 어느 부분을 수행하는 데에도 강제나 구속이 필요한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젊은이는 매우 너그러워서, 교사가 그들에게 쓸모 있으려는 진지한 의도를 얼마간 보이기만 하면, 그의 가르침을 소홀히 하거나 경멸하기는커녕 대개 그가 직무를 수행하면서 보이는 많은 부정확함을 용서하려 하고, 때로는 상당히 심한 태만조차 세상에 숨겨 주려 한다.

80

주목할 것은, 그것을 가르치기 위한 공공 기관이 없는 교육 부분이 대체로 가장 잘 가르쳐진다는 점이다. 젊은이가 검술 학교나 무용 학교에 갈 때, 물론 그가 언제나 검술이나 춤을 아주 잘 배우는 것은 아니지만, 검술이나 춤을 배우지 못하는 일은 드물다. 승마 학교의 좋은 효과는 대개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승마 학교는 비용이 매우 많이 들어서 대부분의 곳에서 공공 기관이다. 문필 교육의 가장 본질적인 세 부분, 곧 읽기, 쓰기, 셈하기는 여전히 공립 학교보다 사설 학교에서 습득하는 것이 더 흔하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것을 필요한 정도까지 습득하지 못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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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에서는 퍼블릭 스쿨이 대학보다 훨씬 덜 부패했다. 학교에서는 청소년들이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곧 교사들이 가르친다고 내세우거나 가르치리라 기대되는 모든 것을 배우거나, 적어도 배울 수 있다. 대학에서는 청소년들이 그 법인체들이 가르쳐야 할 학문을 배우지도 못하고, 그것을 배울 적절한 수단을 언제나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학교 교사의 보수는 대부분의 경우 주로, 어떤 경우에는 거의 전적으로 학생들의 수업료나 사례금에 달려 있다. 학교에는 독점적 특권이 없다. 학위의 영예를 얻기 위해 어떤 퍼블릭 스쿨에서 일정 연수 공부했다는 증명서를 가져올 필요는 없다. 시험에서 그가 그곳에서 가르치는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드러나면, 그것을 어디서 배웠는지는 묻지 않는다.

82

대학에서 흔히 가르치는 교육 부분은 그다지 잘 가르쳐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관이 없었다면 그것은 흔히 전혀 가르쳐지지 않았을 것이고, 개인과 공공 모두 그 중요한 교육 부분의 결여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83

현재 유럽의 대학들은 원래 그 대부분이 성직자 교육을 위해 설립된 교회 법인체였다. 그것은 교황의 권위로 설립되었으며, 교황의 직접 보호 아래 완전히 놓여 있어서, 그 구성원은 교사든 학생이든 모두 당시 이른바 성직자 특권(benefit of clergy)을 가졌다. 곧 각자의 대학이 있는 나라의 세속 재판권에서 면제되었고, 교회 법정의 재판만 받았다. 그 대학들 대부분에서 가르친 것은 그 설립 목적에 맞는 것, 곧 신학이거나 신학을 위한 예비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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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가 처음 법으로 확립되었을 때, 타락한 라틴어가 유럽 서부 모든 지역의 공용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교회의 예배와 교회에서 읽는 성경 번역본은 모두 그 타락한 라틴어, 곧 그 나라의 공용어로 되어 있었다. 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미개 민족들이 침입한 뒤, 라틴어는 점차 유럽 어느 지역의 언어도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경건함은 종교의 확립된 형식과 의식을, 그것을 처음 도입하고 합리적으로 만든 사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뒤에도 오랫동안 자연히 보존한다. 그러므로 라틴어는 이제 어디서도 국민 대다수가 이해하지 못했지만, 교회의 모든 예배는 여전히 그 언어로 계속 행해졌다. 그리하여 유럽에는 고대 이집트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두 개의 다른 언어, 곧 사제의 언어와 민중의 언어, 거룩한 언어와 속된 언어, 학식 있는 언어와 학식 없는 언어가 확립되었다. 그런데 사제는 자기가 예식을 집전해야 하는 그 거룩하고 학식 있는 언어를 얼마간 이해해야 했다. 그러므로 라틴어 공부는 처음부터 대학 교육의 본질적인 부분을 이루었다.

85

그리스어나 히브리어는 그렇지 않았다. 교회의 무오한 교령은 흔히 라틴어 불가타(Latin Vulgate)라고 불리는 성경의 라틴어 번역본이 똑같이 신의 영감으로 구술된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원본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그 두 언어의 지식은 성직자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 공부는 오랫동안 대학 교육의 통상 과정의 필수 부분을 이루지 않았다. 그리스어 공부가 아직도 그 과정의 어떤 부분도 이룬 적이 없는 에스파냐 대학들이 있다고 나는 확실히 들었다. 최초의 종교개혁자들은 신약성경의 그리스어 본문, 심지어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본문이 불가타 번역본보다 자기들의 의견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불가타 번역본은 자연히 짐작할 수 있듯이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떠받치도록 점차 맞춰져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번역본의 많은 오류를 폭로하는 일에 착수했고,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은 그로써 그것을 변호하거나 해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은 원어에 대한 얼마간의 지식 없이는 하기 어려웠으므로, 원어 공부가 종교개혁의 교리를 받아들인 대학과 거부한 대학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대학에 점차 도입되었다. 그리스어는 고전 학문의 모든 부분과 결부되어 있었다. 고전 학문은 처음에는 주로 가톨릭교도와 이탈리아인이 연구했지만, 마침 종교개혁의 교리가 일어난 것과 거의 같은 무렵에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대학에서 그 언어는 철학 공부에 앞서, 학생이 라틴어에서 얼마간 진보하자마자 가르쳐졌다. 히브리어는 고전 학문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성경을 제외하면 조금이라도 존중받는 책 한 권의 언어도 아니었으므로, 그 공부는 대개 철학 공부 뒤에, 학생이 신학 공부에 들어선 뒤에야 시작되었다.

86

원래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기초는 모두 대학에서 가르쳤으며, 어떤 대학에서는 지금도 그러하다. 다른 대학에서는 학생이 그 두 언어 가운데 하나 또는 둘 모두의 적어도 기초는 미리 습득하고 오기를 기대한다. 그 언어들의 공부는 어디서나 여전히 대학 교육의 매우 상당한 부분을 이룬다.

87

고대 그리스 철학은 세 큰 부문, 곧 자연학 또는 자연철학, 윤리학 또는 도덕철학, 그리고 논리학으로 나뉘었다. 이 일반적 구분은 사물의 본성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 같다.

88

자연의 큰 현상들, 곧 천체의 운행, 일식과 월식, 혜성, 천둥과 번개와 다른 비상한 대기 현상, 식물과 동물의 발생과 생명과 성장과 소멸은 필연적으로 인류의 경이를 불러일으키므로, 자연히 그 원인을 탐구하려는 인류의 호기심도 불러일으킨다. 미신은 처음에 그 모든 경이로운 현상을 신들의 직접적인 작용에 돌림으로써 이 호기심을 만족시키려 했다. 철학은 나중에 그것을 신들의 작용보다 더 친숙한 원인, 곧 인류가 더 잘 아는 원인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 큰 현상들이 인간 호기심의 첫 대상이듯, 그것을 설명한다고 내세우는 학문은 자연히 가장 먼저 연구된 철학 부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 기록을 남긴 최초의 철학자들은 자연철학자였던 것 같다.

89

세계의 모든 시대와 나라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성격과 의도와 행동에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며, 인간 생활의 처신을 위한 많은 존중할 만한 규칙과 격률이 세워지고 공동의 동의로 인정되었을 것이다. 문자가 유행하자마자, 현자들, 또는 자기가 현자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자연히 그 확립되고 존중받는 격률의 수를 늘리고, 무엇이 적절한 처신이고 무엇이 부적절한 처신인지에 대한 자기 생각을 때로는 이른바 이솝 우화 같은 비유담이라는 더 인위적인 형식으로, 때로는 솔로몬의 잠언, 테오그니스(Theognis)와 포킬리데스(Phocyllides)의 시구, 헤시오도스(Hesiod) 작품의 일부 같은 금언, 곧 지혜로운 말이라는 더 단순한 형식으로 표현하려 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오랫동안 그 분별과 도덕의 격률의 수를 늘리기만 했을 뿐, 그것을 어떤 뚜렷하거나 체계적인 순서로 배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고, 더욱이 그것들이 마치 결과가 그 자연적 원인에서 도출되듯 모두 도출될 수 있는 하나 이상의 일반 원리로 그것들을 결합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몇 가지 공통 원리로 결합된 여러 관찰을 체계적으로 배열하는 것의 아름다움은 그 고대에 자연철학의 체계를 향한 조잡한 시도에서 처음으로 드러났다. 나중에 같은 종류의 것이 도덕에서도 시도되었다. 일상생활의 격률이 어떤 체계적인 순서로 배열되고 몇 가지 공통 원리로 결합되었다. 그들이 자연의 현상을 배열하고 결합하려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였다. 그 결합 원리를 탐구하고 설명한다고 내세우는 학문이 엄밀히 도덕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90

여러 저자가 자연철학과 도덕철학 모두에서 여러 체계를 내놓았다. 그러나 그들이 그 여러 체계를 뒷받침한 논증은 언제나 논증적 증명이기는커녕, 흔히 기껏해야 매우 빈약한 개연성에 지나지 않았고, 때로는 일상 언어의 부정확성과 모호성 외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순전한 궤변이었다. 사변적 체계는 세계의 모든 시대에,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작은 금전적 이해가 걸린 문제에서도 판단을 결정하지 않았을 만큼 하찮은 이유로 채택되어 왔다. 조잡한 궤변은 철학과 사변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인류의 의견에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친 적이 없다. 그리고 이런 문제에서는 흔히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자연철학과 도덕철학의 각 체계의 옹호자들은 자연히 자기 체계와 반대되는 체계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논증의 약점을 폭로하려 했다. 그 논증을 검토하면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개연적 논증과 논증적 증명, 오류적 논증과 결정적 논증 사이의 차이를 고찰하게 되었다. 그리고 논리학, 곧 좋은 추론과 나쁜 추론의 일반 원리에 관한 학문은 이런 종류의 검토가 계기가 된 관찰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났다. 논리학은 그 기원에서는 자연학과 윤리학 모두보다 나중이지만, 고대 철학 학파의 전부는 아니어도 대부분에서 대개 그 두 학문의 어느 것보다 먼저 가르쳐졌다. 학생은 그토록 중요한 주제에 대해 추론하도록 이끌리기 전에 좋은 추론과 나쁜 추론의 차이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여겨졌던 것 같다.

91

철학을 세 부분으로 나누는 이 고대의 구분은 유럽 대부분의 대학에서 다섯 부분으로 나누는 다른 구분으로 바뀌었다.

92

고대 철학에서는 인간 정신의 본성이나 신의 본성에 관해 가르친 것은 무엇이든 자연학 체계의 일부를 이루었다. 그 존재들은 그 본질이 무엇으로 이루어진다고 여겨지든 우주라는 큰 체계의 부분이었고, 그것도 가장 중요한 결과를 낳는 부분이었다. 인간 이성이 그것들에 관해 결론짓거나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우주라는 큰 체계의 기원과 운행을 설명한다고 내세우는 학문의 이를테면 두 장(章)—물론 매우 중요한 두 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철학이 오직 신학에 종속된 것으로서만 가르쳐진 유럽의 대학들에서는, 그 학문의 다른 어떤 장보다 이 두 장에 더 오래 머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것은 점점 더 확장되었고 많은 하위 장으로 나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알 수 있는 것이 그토록 적은 영(靈)에 관한 학설이 알 수 있는 것이 그토록 많은 물체에 관한 학설만큼 철학 체계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두 주제에 관한 학설은 두 개의 별개 학문을 이루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른바 형이상학, 또는 영물학(pneumatics)이 자연학에 맞세워졌고, 더 숭고한 학문으로서뿐 아니라 특정 직업의 목적을 위해서는 둘 가운데 더 유용한 학문으로서 연구되었다. 실험과 관찰의 본래 대상, 곧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 그토록 많은 유용한 발견을 할 수 있는 대상은 거의 완전히 무시되었다. 아주 적은 단순하고 거의 자명한 진리를 넘어서면 가장 세심한 주의로도 모호함과 불확실함밖에 발견할 수 없고, 따라서 미묘한 논변과 궤변밖에 낳을 수 없는 대상이 크게 연구되었다.

93

그 두 학문이 이렇게 서로 맞세워지자, 둘 사이의 비교는 자연히 셋째 학문, 곧 이른바 존재론, 다시 말해 다른 두 학문의 대상 모두에 공통된 성질과 속성을 다루는 학문을 낳았다. 그러나 미묘한 논변과 궤변이 스콜라 학파의 형이상학 또는 영물학의 대부분을 이루었다면, 그것은 때로 역시 형이상학이라고 불린 이 거미줄 같은 존재론이라는 학문의 전부를 이루었다.

94

개인으로서뿐 아니라 가족과 국가와 인류라는 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볼 때 인간의 행복과 완성은 무엇에 있는가 하는 것이 고대 도덕철학이 탐구하려 한 대상이었다. 그 철학에서 인간 생활의 의무는 인간 생활의 행복과 완성에 종속된 것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자연철학과 마찬가지로 도덕철학도 오직 신학에 종속된 것으로서만 가르쳐지게 되자, 인간 생활의 의무는 주로 내세의 행복에 종속된 것으로 다루어졌다. 고대 철학에서 덕의 완성은 그것을 지닌 사람에게 이승에서 가장 완전한 행복을 필연적으로 낳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근대 철학에서 그것은 흔히 이승에서의 어떤 정도의 행복과도 대체로, 아니 거의 언제나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천국은 오직 고행과 금욕으로, 곧 인간의 너그럽고 관대하며 기개 있는 행동이 아니라 수도사의 엄격함과 자기 비하로써만 얻을 수 있었다. 결의론(決疑論)과 금욕적 도덕이 대부분의 경우 스콜라 학파 도덕철학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철학의 여러 부문 가운데 단연 가장 중요한 것이 이렇게 하여 단연 가장 타락한 것이 되었다.

95

그러므로 유럽 대부분의 대학에서 철학 교육의 통상 과정은 이러했다. 논리학을 먼저 가르쳤다. 존재론이 둘째 자리에 왔다. 인간 영혼과 신의 본성에 관한 학설을 포함하는 영물학이 셋째에 왔다. 넷째에는 타락한 도덕철학 체계가 뒤따랐는데, 그것은 영물학의 학설, 곧 인간 영혼의 불멸성, 그리고 신의 정의로 보아 내세에 기대되는 상벌과 직접 결부된 것으로 여겨졌다. 짧고 피상적인 자연학 체계가 대개 그 과정을 마무리했다.

96

유럽의 대학들이 이렇게 고대 철학 과정에 도입한 변경은 모두 성직자 교육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을 신학 공부에 더 알맞은 입문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변경이 그 과정에 도입한 추가적인 미묘한 논변과 궤변, 결의론과 금욕적 도덕은 확실히 그것을 젠틀맨이나 세상 사람의 교육에 더 알맞게 만들지도 않았고, 이해력을 향상시키거나 마음을 바로잡을 가능성을 더 크게 만들지도 않았다.

97

이 철학 과정은 지금도 유럽 대부분의 대학에서 가르쳐지고 있다. 각 대학의 구조가 교사들에게 근면을 얼마나 더 또는 덜 필요하게 만드느냐에 따라 근면의 정도는 다르다. 가장 부유하고 가장 기본재산이 많은 일부 대학에서는 튜터들이 이 타락한 과정의 서로 연결되지 않은 몇 조각과 부스러기만 가르치는 데 만족한다. 그리고 그것조차 대개 매우 태만하고 피상적으로 가르친다.

98

근대에 철학의 여러 부문에서 이루어진 개량은 물론 일부는 대학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대부분은 대학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대학은 그 개량이 이루어진 뒤에도 그것을 채택하는 데 그다지 적극적이지조차 않았다. 그리고 그 학문적 단체 가운데 여럿은 오랫동안, 논파된 체계와 낡은 편견이 세계의 다른 모든 구석에서 쫓겨난 뒤 피난처와 보호를 찾는 성역으로 남아 있기를 택했다. 일반적으로 가장 부유하고 가장 기본재산이 많은 대학이 그 개량을 가장 늦게 채택했고, 확립된 교육 계획의 상당한 변경을 허용하기를 가장 싫어했다. 그 개량은 교사들이 생활 자료의 대부분을 명성에 의존하여 세상의 통용 의견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던 일부 더 가난한 대학에 더 쉽게 도입되었다.

99

그러나 유럽의 퍼블릭 스쿨과 대학은 원래 특정 직업, 곧 성직자의 교육만을 위해 의도된 것이었고, 그 직업에 필요하다고 여겨진 학문에서조차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언제나 매우 부지런하지는 않았지만, 점차 거의 모든 다른 사람들의 교육, 특히 거의 모든 젠틀맨과 재산가의 교육을 끌어들였다. 유년기와, 사람들이 세상의 실제 일, 곧 남은 생애 동안 종사할 일에 진지하게 몰두하기 시작하는 시기 사이의 긴 기간을 조금이라도 유익하게 보내는 데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학교와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의 대부분은 그 일을 위한 가장 적절한 준비가 아닌 것 같다.

100

잉글랜드에서는 젊은이들을 학교를 마치자마자 대학에 보내지 않고 외국 여행을 보내는 것이 날마다 점점 더 관습이 되고 있다. 우리 젊은이들은 대개 여행으로 크게 향상되어 돌아온다고들 한다. 열일곱이나 열여덟 살에 외국에 나가 스물한 살에 돌아오는 젊은이는 외국에 나갈 때보다 서너 살 더 나이가 들어 돌아온다. 그리고 그 나이에는 3, 4년 동안 상당히 향상되지 않기가 매우 어렵다. 여행하는 동안 그는 대개 한두 외국어에 대한 얼마간의 지식을 얻는다. 그러나 그 지식은 그 언어를 제대로 말하거나 쓸 수 있게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다른 면에서 그는 대개 집에서 살았다면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그렇게 되기 어려웠을 만큼 더 자만하고, 더 무원칙하고, 더 방탕하고, 공부에든 일에든 진지하게 몰두할 능력이 더 없어져서 돌아온다. 그토록 어린 나이에 여행하고, 부모와 친척의 감독과 통제에서 멀리 떨어져 인생의 가장 귀중한 시절을 가장 경박한 방탕 속에 보냄으로써, 그의 교육의 초기 단계가 그에게 형성하려 했을지 모르는 모든 유용한 습관은 굳어지고 확고해지기는커녕 거의 필연적으로 약해지거나 지워진다. 대학이 스스로 빠지도록 내버려 두고 있는 불신이 아니었다면, 인생의 이토록 이른 시기에 여행하는 그토록 불합리한 관행이 평판을 얻게 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아들을 외국에 보냄으로써 아버지는 적어도 한동안은 일자리 없이 방치되어 자기 눈앞에서 망가져 가는 아들이라는 그토록 불쾌한 대상에서 벗어난다.

101

근대의 몇몇 교육 기관의 효과는 이러했다.

102

다른 시대와 다른 국민에게서는 다른 교육 계획과 다른 교육 기관이 행해졌던 것 같다.

103

고대 그리스의 공화국들에서는 모든 자유 시민이 공공 관리의 지휘 아래 체육 훈련과 음악을 배웠다. 체육 훈련으로는 몸을 단련하고 용기를 날카롭게 하며 전쟁의 노고와 위험에 대비시키려 했다. 그리고 그리스 민병은 모든 기록으로 보아 세상에 존재했던 가장 훌륭한 민병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그들의 공공 교육의 이 부분은 의도한 목적에 완전히 부응했을 것이다. 다른 부분인 음악으로는, 적어도 그 제도에 관해 우리에게 기록을 남긴 철학자와 역사가들에 따르면, 정신을 인간답게 하고, 기질을 부드럽게 하며, 공적·사적 생활의 모든 사회적·도덕적 의무를 수행하도록 정신을 준비시키려 했다.

104

고대 로마에서는 마르스 연병장의 훈련이 고대 그리스의 김나지움 훈련과 같은 목적에 이바지했으며, 똑같이 잘 이바지한 것 같다. 그러나 로마인에게는 그리스인의 음악 교육에 해당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로마인의 도덕은 사적 생활에서나 공적 생활에서나 그리스인의 도덕과 대등했을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훨씬 우월했던 것 같다. 그들이 사적 생활에서 우월했다는 것은 두 국민을 모두 잘 아는 두 저자, 폴리비오스(Polybius)와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Dionysius of Halicarnassus)의 명시적인 증언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 역사의 전체 흐름이 로마인의 공적 도덕의 우월성을 증언한다. 다투는 당파들의 온건함과 절제가 자유 국민의 공적 도덕에서 가장 본질적인 사정인 것 같다. 그런데 그리스인의 당파 싸움은 거의 언제나 격렬하고 피비린내 났다. 반면 그라쿠스 형제 시대까지 로마의 어떤 당파 싸움에서도 피를 흘린 적이 없었으며, 그라쿠스 형제 시대부터 로마 공화정은 실제로 해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플라톤(Plato),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폴리비오스의 매우 존경할 만한 권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몽테스키외가 그 권위를 뒷받침하려 한 매우 재간 있는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의 음악 교육이 그들의 도덕을 바로잡는 데 큰 효과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교육 없이도 로마인의 도덕이 전체적으로 우월했기 때문이다. 그 고대 현자들이 조상의 제도에 대해 품은 존경은 아마 그들로 하여금, 어쩌면 그 사회들의 가장 이른 시기부터 그들이 상당한 세련에 이른 시대까지 중단 없이 계속된 옛 관습에 지나지 않았을 것에서 많은 정치적 지혜를 찾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음악과 춤은 거의 모든 미개 민족의 큰 오락이며, 어떤 사람이든 동료들을 즐겁게 하기에 알맞게 만든다고 여겨지는 큰 재주다. 오늘날 아프리카 해안의 흑인들 사이에서도 그러하다. 고대 켈트인 사이에서도, 고대 스칸디나비아인 사이에서도, 그리고 호메로스에게서 알 수 있듯이 트로이 전쟁 이전 시대의 고대 그리스인 사이에서도 그러했다. 그리스 부족들이 작은 공화국들을 이루었을 때, 그 재주의 공부가 오랫동안 국민의 공적이고 공통된 교육의 일부를 이룬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05

청소년에게 음악이나 군사 훈련을 가르친 교사들은 로마에서도, 그리고 우리가 그 법률과 관습을 가장 잘 아는 그리스 공화국인 아테네에서조차, 국가가 보수를 주거나 임명하기조차 한 것 같지 않다. 국가는 모든 자유 시민이 전쟁에서 국가를 방어할 수 있도록 스스로 준비하고, 그런 까닭에 군사 훈련을 배울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훈련을 자기가 찾을 수 있는 교사에게서 배우도록 맡겨 두었으며, 이 목적을 위해 그가 훈련을 연습하고 실행할 공공 연병장이나 훈련장 외에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은 것 같다.

106

그리스와 로마 공화국 모두 초기에는 교육의 다른 부분이 읽기, 쓰기, 그리고 당시의 산술에 따른 셈하기를 배우는 것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부유한 시민들은 흔히 대개 노예나 해방 노예인 가정교사의 도움을 받아 집에서 이 재주를 습득한 것 같고, 가난한 시민들은 보수를 받고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하는 교사의 학교에서 습득한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교육 부분은 전적으로 각 개인의 부모나 후견인의 보살핌에 맡겨졌다. 국가가 그것에 대해 어떤 감독이나 지휘를 맡은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솔론(Solon)의 한 법에 따라, 자식에게 어떤 이로운 직업이나 생업을 가르치기를 소홀히 한 부모를 부양할 의무에서 자식은 면제되었다.

107

세련이 진보하여 철학과 수사학이 유행하자, 상류층 사람들은 이 유행하는 학문을 배우도록 자식을 철학자와 수사학자의 학교에 보내곤 했다. 그러나 그 학교들은 공공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 그것은 오랫동안 공공에 의해 겨우 용인되었을 뿐이다. 철학과 수사학에 대한 수요는 오랫동안 매우 적어서, 그 어느 쪽이든 최초의 전문 교사들은 어느 한 도시에서도 꾸준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곳저곳 돌아다녀야 했다. 엘레아의 제논(Zeno of Elea),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고르기아스(Gorgias), 히피아스(Hippias)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살았다. 수요가 늘어나자 철학 학교와 수사학 학교는 처음에는 아테네에서, 나중에는 다른 여러 도시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는 그 가운데 일부에게 가르칠 특정 장소를 배정해 주는 것 이상으로 그들을 장려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 일은 때로 개인 기부자들도 했다. 국가는 플라톤에게 아카데미아(Academy)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리케이온(Lyceum)을,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키티온의 제논(Zeno of Citta)에게 주랑(Portico)을 배정한 것 같다. 그러나 에피쿠로스(Epicurus)는 자기 정원을 자기 학파에 유증했다. 그러나 마르쿠스 안토니누스(Marcus Antoninus)의 시대 무렵까지는 어떤 교사도 공공으로부터 봉급을 받거나, 학생들의 사례금이나 수업료에서 나오는 것 외에 다른 보수를 받은 것 같지 않다. 루키아노스(Lucian)에게서 알 수 있듯이 그 철학자 황제가 철학 교사 한 사람에게 내린 하사금은 아마 황제 자신의 생애보다 오래 계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학위 특권에 해당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어떤 특정 직업이나 생업에 종사하도록 허락받기 위해 그 학교 가운데 어디에 다녔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 학교의 유용성에 대한 평판이 학생들을 끌어들이지 못하면, 법은 누구에게도 그곳에 가도록 강제하지 않았고, 그곳에 다닌 것에 대해 누구에게도 보상하지 않았다. 교사들은 학생들에 대해 아무런 재판권도 없었고, 뛰어난 덕과 능력이 자기 교육의 어느 부분을 맡은 사람들에 대해 젊은이들에게서 반드시 얻어 내는 자연적 권위 외에는 아무런 권위도 없었다.

108

로마에서는 시민법 공부가 시민 대부분이 아니라 일부 특정 가문의 교육의 일부를 이루었다. 그러나 법률 지식을 얻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는 다닐 공립 학교가 없었고, 법률을 안다고 여겨지는 친척과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는 것 외에는 그것을 공부할 다른 방법이 없었다. 12표법의 상당수가 고대 그리스의 몇몇 공화국의 법을 베낀 것이었지만, 고대 그리스의 어느 공화국에서도 법이 학문으로 자라난 적은 없는 것 같다는 점은 아마 주목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로마에서 법은 매우 일찍 학문이 되었으며, 그것을 안다는 평판을 지닌 시민들에게 상당한 명성을 주었다. 고대 그리스의 공화국들, 특히 아테네에서 통상의 법정은 수가 많아서 무질서한 사람들의 무리로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흔히 거의 되는대로, 또는 마침 아우성과 파벌과 당파심이 정하는 대로 판결했다. 부당한 판결의 치욕은 그것이 5백 명, 천 명, 또는 천5백 명(그들의 법정 가운데 일부는 그토록 수가 많았다)에게 나뉠 때 어느 개인에게도 그리 무겁게 떨어질 수 없었다. 반대로 로마에서는 주요 법정이 단독 재판관이나 소수의 재판관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그들은 언제나 공개적으로 심의했으므로, 그들의 평판은 어떤 경솔하거나 부당한 판결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의심스러운 사건에서 그런 법정은 비난을 피하려는 염려에서 자연히 같은 법정이나 다른 법정에서 자기들보다 앞서 재판한 재판관들의 본보기나 선례 뒤에 숨으려 했을 것이다. 관행과 선례에 대한 이런 주의가 필연적으로 로마법을 그것이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규칙적이고 질서 정연한 체계로 형성했다. 그리고 비슷한 주의가 이루어진 다른 모든 나라의 법에도 비슷한 효과를 미쳤다. 폴리비오스와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가 그토록 강조한 그리스인에 대한 로마인의 성격상의 우월성은 아마 그 저자들이 그 원인으로 드는 어떤 사정보다는 로마 법정의 더 나은 구조 덕분이었을 것이다. 로마인은 맹세를 특히 존중하는 것으로 두드러졌다고 한다. 그러나 부지런하고 잘 아는 법정 앞에서만 맹세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폭도 같고 무질서한 집회 앞에서 같은 일을 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보다 자연히 자기가 맹세하는 것에 훨씬 더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109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시민적·군사적 능력이 적어도 근대의 어느 국민의 능력과 대등했다는 것은 누구나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우리의 편견은 아마 오히려 그것을 과대평가하는 쪽일 것이다. 그러나 군사 훈련에 관한 것을 제외하면, 국가는 그 위대한 능력을 형성하는 데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스인의 음악 교육이 그것을 형성하는 데 크게 중요했으리라고는 나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국민들 사이에서는 그들 사회의 사정상 상류층 사람들이 배울 필요가 있거나 배우는 것이 편리한 모든 기술과 학문을 가르칠 교사들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가르침에 대한 수요가 언제나 그러하듯 그것을 베푸는 재능을 낳았다. 그리고 제한 없는 경쟁이 반드시 불러일으키는 경쟁심이 그 재능을 매우 높은 완성의 정도로 끌어올린 것 같다. 고대 철학자들이 불러일으킨 관심, 그들이 청중의 의견과 원칙에 대해 얻은 지배력, 그들이 그 청중의 행동과 대화에 일정한 어조와 성격을 줄 수 있었던 능력에서, 그들은 근대의 어떤 교사보다도 훨씬 뛰어났던 것 같다. 근대에는 공공 교사들의 근면이 그들을 각자 직업에서의 성공과 명성으로부터 많든 적든 독립시키는 사정 때문에 많든 적든 타락했다. 또한 그들의 봉급은 그들과 경쟁하려는 사설 교사를, 장려금 없이 상당한 장려금을 받으며 무역하는 사람들과 경쟁하려는 상인과 같은 처지에 놓는다. 그가 자기 재화를 거의 같은 값에 팔면 같은 이윤을 얻을 수 없으며, 파산과 몰락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빈곤과 걸식이 틀림없이 그의 운명이 될 것이다. 그가 그것을 훨씬 비싸게 팔려 하면 고객이 너무 적어서 그의 형편이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학위 특권은 많은 나라에서 학식 있는 직업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 곧 학식 있는 교육이 필요한 사람의 단연 대부분에게 필요하거나 적어도 지극히 편리하다. 그런데 그 특권은 공공 교사의 강의를 들어야만 얻을 수 있다. 어느 사설 교사의 가장 유능한 가르침을 가장 열심히 들어도 언제나 그것을 요구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여러 원인 때문에, 대학에서 흔히 가르치는 학문 가운데 어느 것이든 사설 교사는 근대에 대개 문필가 가운데 가장 낮은 계층으로 여겨진다. 진정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자기 능력을 돌릴 수 있는 일 가운데 이보다 더 굴욕적이거나 수익성 없는 일을 찾기는 어렵다. 학교와 대학의 기본재산은 이렇게 공공 교사의 근면을 타락시켰을 뿐 아니라 좋은 사설 교사를 두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10

만일 교육을 위한 공공 기관이 없다면, 어느 정도의 수요가 없거나, 시대의 사정이 배우는 것을 필요하거나 편리하거나 적어도 유행하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 체계나 학문은 가르쳐지지 않을 것이다. 사설 교사는 유용하다고 인정되는 학문의 논파되고 낡은 체계나, 쓸모없고 현학적인 궤변과 헛소리의 더미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편적으로 여겨지는 학문을 가르쳐서는 결코 수지를 맞출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체계, 그런 학문은 그 번영과 수입이 상당 부분 그 근면과 무관한 교육을 위한 법인체 외에는 어디에서도 존속할 수 없다. 만일 교육을 위한 공공 기관이 없다면, 젠틀맨은 시대의 사정이 제공한다고 여겨지는 가장 완전한 교육 과정을 노력과 능력을 기울여 마친 뒤, 젠틀맨과 세상 사람들 사이의 대화의 일반적인 주제가 되는 모든 것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채로 세상에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111

여성 교육을 위한 공공 기관은 없으며, 그래서 그들 교육의 통상 과정에는 쓸모없거나 불합리하거나 공상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부모나 후견인이 배우는 것이 필요하거나 유용하다고 판단하는 것을 배우며, 그 밖에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그들 교육의 모든 부분은 분명히 어떤 유용한 목적을 지향한다. 곧 몸의 타고난 매력을 높이거나, 정신을 신중함, 겸손, 정숙, 절약으로 형성하여, 한 가정의 안주인이 될 가능성을 높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적절히 처신하게 하는 것이다. 여성은 생애의 모든 시기에 자기 교육의 모든 부분에서 얼마간의 편익이나 이점을 느낀다. 남성이 생애의 어느 시기에든 자기 교육의 가장 고되고 성가신 부분 가운데 일부에서 어떤 편익이나 이점을 얻는 일은 드물다.

112

그렇다면 공공은 국민의 교육에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말아야 하는가, 하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얼마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면, 국민의 여러 계층에서 공공이 주의를 기울여야 할 교육의 부분은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가?

113

어떤 경우에는 사회의 상태가 필연적으로 개인의 대부분을, 정부의 아무런 주의 없이도 그 상태가 요구하는, 또는 아마 허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능력과 덕을 그들 안에 자연히 형성하는 처지에 놓는다. 다른 경우에는 사회의 상태가 개인의 대부분을 그런 처지에 놓지 않으며, 국민 대다수의 거의 완전한 타락과 퇴화를 막기 위해 정부의 얼마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114

분업이 진행됨에 따라, 노동으로 사는 사람들의 단연 대부분, 곧 국민 대다수의 일은 몇 가지 매우 단순한 작업, 흔히 한두 가지 작업에 국한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의 이해력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일상적인 일로 형성된다. 그 결과도 아마 언제나 같거나 거의 같은 몇 가지 단순한 작업을 하는 데 평생을 보내는 사람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 어려움을 없앨 방편을 찾아내기 위해 이해력을 발휘하거나 창의력을 쓸 기회가 없다. 그러므로 그는 자연히 그런 노력의 습관을 잃고, 대개 인간이 될 수 있는 한 우둔하고 무지해진다. 그의 정신의 마비는 그로 하여금 어떤 이성적인 대화도 즐기거나 거기에 참여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어떤 너그럽거나 고귀하거나 다정한 감정도 품지 못하게 하고, 따라서 사생활의 통상적인 의무 가운데 많은 것에 대해서조차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한다. 자기 나라의 크고 광범한 이익에 대해 그는 전혀 판단할 능력이 없다. 그리고 그를 그렇지 않게 만들기 위해 매우 특별한 수고를 들이지 않는 한, 그는 전쟁에서 자기 나라를 방어할 능력도 똑같이 없다. 그의 정체된 생활의 단조로움은 자연히 그의 정신의 용기를 타락시키며, 군인의 불규칙하고 불확실하고 모험적인 생활을 혐오스럽게 여기도록 만든다. 그것은 그의 몸의 활력조차 타락시켜, 그가 길러진 일 외의 다른 어떤 일에서도 힘을 활기차고 끈기 있게 발휘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하여 자기 특정 직업에서의 그의 솜씨는 그의 지적·사회적·무예적 덕을 희생하여 얻어지는 것 같다. 그런데 모든 개량되고 문명화된 사회에서, 정부가 그것을 막기 위해 얼마간 수고하지 않는 한, 노동 빈민, 곧 국민 대다수는 필연적으로 이런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115

흔히 미개 사회라 불리는 수렵민의 사회, 목축민의 사회, 그리고 제조업의 개량과 대외 상업의 확대에 앞서는 미개한 농업 상태의 농경민 사회에서도 사정은 다르다. 그런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의 다양한 일이 모든 사람에게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 끊임없이 생기는 어려움을 없앨 방편을 고안하도록 강제한다. 창의력이 살아 있고, 정신은 문명사회에서 거의 모든 하층 계층의 이해력을 마비시키는 것 같은 그 졸린 우둔함에 빠지도록 내버려지지 않는다. 이른바 그런 미개 사회에서는 이미 말했듯이 모든 사람이 전사다. 또한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정치가이며, 사회의 이익과 그 사회를 다스리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그럭저럭 괜찮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들의 족장이 평시에 얼마나 좋은 재판관이고 전시에 얼마나 좋은 지도자인지는 그들 가운데 거의 모든 사람의 관찰에 분명히 드러난다. 물론 그런 사회에서는 누구도 더 문명화된 상태에서 소수의 사람이 때때로 지니는 그 개선되고 세련된 이해력을 얻기 어렵다. 미개 사회에서는 각 개인의 일에는 상당한 다양성이 있지만, 사회 전체의 일에는 그다지 다양성이 없다.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이 하거나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하거나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상당한 정도의 지식과 재간과 창의력을 가지지만, 큰 정도로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흔히 지니는 정도는 대개 사회의 단순한 업무 전체를 처리하기에 충분하다. 반대로 문명 상태에서는 개인 대부분의 일에는 다양성이 거의 없지만 사회 전체의 일에는 거의 무한한 다양성이 있다. 이 다양한 일은 그 자신은 어떤 특정한 일에도 매여 있지 않아 다른 사람들의 일을 살펴볼 여가와 의향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의 관조에 거의 무한히 다양한 대상을 제시한다. 그토록 다양한 대상을 관조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정신을 끝없는 비교와 결합으로 단련하며, 그들의 이해력을 비상한 정도로 예리하고 포괄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 소수의 사람들이 마침 어떤 매우 특별한 처지에 놓이지 않는 한, 그들의 위대한 능력은 그들 자신에게는 영예롭겠지만 사회의 좋은 통치나 행복에는 거의 기여하지 못할 수 있다. 그 소수의 위대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국민 대다수에게서는 인간 성격의 모든 고귀한 부분이 상당 부분 지워지고 소멸될 수 있다.

116

문명화된 상업 사회에서는 아마 일반 서민의 교육이 어느 정도 신분과 재산이 있는 사람들의 교육보다 더 공공의 주의를 필요로 할 것이다. 어느 정도 신분과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대개 세상에서 이름을 떨치려는 특정 사업이나 전문직이나 직업에 들어서기 전에 열여덟이나 열아홉 살이 된다. 그 전에 그들은 세상의 존경을 받게 하거나 그 존경을 받을 만하게 만들 수 있는 모든 재주를 습득하거나, 적어도 나중에 습득할 준비를 할 충분한 시간이 있다. 그들의 부모나 후견인은 대개 그들이 그런 재주를 갖추기를 충분히 바라며, 대부분의 경우 그 목적에 필요한 비용을 기꺼이 들인다. 그들이 언제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교육에 들인 비용이 부족해서라기보다 그 비용을 부적절하게 쓰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교사가 부족해서라기보다 구할 수 있는 교사의 태만과 무능 때문이며, 현재의 상태에서 더 나은 교사를 찾기 어렵다는 것, 아니 불가능하다는 것 때문인 경우가 많다. 또한 어느 정도 신분이나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생애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은 일반 서민의 일처럼 단순하고 단조롭지 않다. 그것은 거의 모두 지극히 복잡하며, 손보다 머리를 더 쓰는 일이다. 그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이해력은 쓰지 않아서 마비되는 일이 드물다. 게다가 어느 정도 신분과 재산이 있는 사람들의 일은 아침부터 밤까지 그들을 괴롭히는 일인 경우가 드물다. 그들은 대개 상당한 여가가 있으며, 그동안 인생의 초기에 기초를 놓았거나 얼마간 취미를 붙인 유용하거나 장식적인 지식의 모든 부문에서 자기를 완성할 수 있다.

117

일반 서민은 다르다. 그들은 교육에 쓸 시간이 거의 없다. 그들의 부모는 유아기에조차 그들을 부양하기가 어렵다. 그들은 일할 수 있게 되자마자 생활 자료를 벌 수 있는 어떤 직업에 종사해야 한다. 또한 그 직업은 대개 매우 단순하고 단조로워서 이해력을 거의 쓰지 않게 하며, 동시에 그들의 노동은 매우 끊임없고 고되어서 다른 어떤 것에 몰두하거나 그것을 생각할 여가도 거의 남기지 않고 의향은 더더욱 남기지 않는다.

118

그러나 어떤 문명사회에서도 일반 서민이 어느 정도 신분과 재산이 있는 사람들만큼 잘 교육받을 수는 없지만, 교육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 곧 읽기, 쓰기, 셈하기는 인생의 매우 이른 시기에 습득할 수 있어서, 가장 낮은 직업에 종사하도록 길러질 사람들조차 대부분은 그 직업에 고용될 수 있기 전에 그것을 습득할 시간이 있다. 공공은 매우 적은 비용으로 국민 거의 전체에게 그 가장 본질적인 교육 부분을 습득하는 것을 쉽게 하고, 장려하고, 심지어 의무로 지울 수 있다.

119

공공은 모든 교구나 지역에 작은 학교를 세워 보통 노동자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적당한 보수로 아이들을 가르치게 함으로써 이 습득을 쉽게 할 수 있다. 교사는 일부는 공공이 보수를 주되 전부는 주지 않는다. 그가 전부, 또는 주로 공공에게서 보수를 받는다면 곧 자기 일을 소홀히 하는 법을 배울 것이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에서는 그런 교구 학교의 설립이 일반 서민 거의 전부에게 읽기를, 그리고 그 매우 큰 비율에게 쓰기와 셈하기를 가르쳤다. 잉글랜드에서는 자선 학교의 설립이 같은 종류의 효과를 냈지만, 그렇게 보편적이지는 않았다. 그 설립이 그렇게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작은 학교들에서 아이들에게 읽기를 가르치는 책이 보통보다 조금 더 교훈적이고, 일반 서민의 아이들이 때로 그곳에서 배우지만 그들에게 거의 아무 쓸모도 없는 라틴어 수박 겉핥기 대신 기하학과 역학의 기초를 배운다면, 이 계층 사람들의 문필 교육은 아마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해질 것이다. 기하학과 역학의 원리를 적용할 기회를 얼마간 주지 않는 일반 직업은 거의 없으며, 따라서 그 원리에서 일반 서민을 점차 단련하고 향상시키지 않을 직업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원리는 가장 숭고한 학문뿐 아니라 가장 유용한 학문에도 필요한 입문이다.

120

공공은 그 가장 본질적인 교육 부분에서 뛰어난 일반 서민의 아이들에게 작은 상금과 작은 영예의 표지를 줌으로써 그 습득을 장려할 수 있다.

121

공공은 모든 사람이 어떤 동업조합의 자유민 자격을 얻거나, 촌락이나 자치 도시에서 어떤 직업을 개업하도록 허락받기 전에 그 가장 본질적인 교육 부분에 대해 시험이나 검정을 받도록 의무화함으로써, 국민 거의 전체에게 그것을 습득할 필요를 지울 수 있다.

122

그리스와 로마 공화국이 각자 시민들의 무예 정신을 유지한 것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곧 군사 및 체육 훈련의 습득을 쉽게 하고, 그것을 장려하고, 심지어 국민 전체에게 그 훈련을 배울 필요를 지움으로써였다. 그들은 그 훈련을 배우고 연습할 일정한 장소를 정하고, 일정한 교사들에게 그곳에서 가르칠 특권을 줌으로써 그 습득을 쉽게 했다. 그 교사들은 봉급도 어떤 종류의 독점적 특권도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의 보수는 전적으로 학생들에게서 받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공공 김나지움에서 훈련을 배운 시민은 사적으로 배운 시민에 대해, 후자가 똑같이 잘 배웠다면 아무런 법적 이점도 가지지 않았다. 그 공화국들은 그 훈련에서 뛰어난 사람들에게 작은 상금과 영예의 표지를 줌으로써 그 습득을 장려했다. 올림피아, 이스트미아, 네메아 경기에서 상을 받는 것은 그것을 받은 사람뿐 아니라 그의 가족과 친척 전체에게 명성을 주었다. 모든 시민이 소집되면 공화국의 군대에서 일정 연수 복무해야 할 의무는 그 훈련을 배울 필요를 충분히 지웠다. 그 훈련 없이는 그 복무에 적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23

개량이 진보함에 따라, 정부가 적절한 수고를 들여 그것을 떠받치지 않는 한, 군사 훈련의 실시가 점차 쇠퇴하고 그와 함께 국민 대다수의 무예 정신도 쇠퇴한다는 것은 근대 유럽의 예가 충분히 증명한다. 그러나 모든 사회의 안전은 언제나 많든 적든 국민 대다수의 무예 정신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 무예 정신만으로는, 잘 규율된 상비군의 뒷받침 없이는 아마 어떤 사회의 방위와 안전에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시민이 군인의 정신을 지닌 곳에서는 확실히 더 작은 상비군으로 충분할 것이다. 게다가 그 정신은 흔히 상비군에 대해 우려되는 자유에 대한 위험을, 그것이 실제이든 상상이든, 필연적으로 크게 줄일 것이다. 그것은 외국 침략자에 맞선 그 군대의 작전을 크게 쉽게 해 줄 것이므로, 만일 불행히도 그 군대의 작전이 국가 구조를 겨누게 된다면 그만큼 그것을 방해할 것이다.

124

그리스와 로마의 옛 제도는 근대의 이른바 민병 제도보다 국민 대다수의 무예 정신을 유지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훨씬 단순했다. 일단 확립되면 스스로 시행되었으며, 그것을 가장 완전한 활력 속에 유지하는 데 정부의 주의가 거의 또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반면 근대 민병의 복잡한 규정을 그럭저럭 시행되는 상태로라도 유지하려면 정부의 끊임없고 고된 주의가 필요하며, 그것이 없으면 그 규정은 끊임없이 완전히 방치되고 폐기되어 간다. 게다가 옛 제도의 영향은 훨씬 보편적이었다. 그것으로 국민 전체가 무기 사용을 완전히 익혔다. 반면 근대 민병의 규정으로 그렇게 익힐 수 있는 것은, 아마 스위스 민병을 제외하면, 국민의 아주 작은 부분뿐이다. 그런데 겁쟁이, 곧 자기를 방어하지도 복수하지도 못하는 사람은 분명히 인간 성격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 하나를 결여하고 있다. 그는 몸의 가장 본질적인 기관 일부를 빼앗겼거나 그 쓰임을 잃은 사람이 몸에서 그러한 만큼 정신에서 불구이고 기형이다. 그는 분명히 둘 가운데 더 비참하고 불행한 사람이다. 전적으로 정신에 깃드는 행복과 불행은 필연적으로 몸의 상태보다는 정신의 건강하거나 건강하지 않은 상태, 불구이거나 온전한 상태에 더 달려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민의 무예 정신이 사회의 방위에 아무 쓸모가 없다 하더라도, 겁 많음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그런 종류의 정신적 불구와 기형과 비참이 국민 대다수에게 퍼지지 않도록 막는 것은 여전히 정부의 가장 진지한 주의를 받을 만할 것이다. 그것은 나병이나 다른 어떤 혐오스럽고 불쾌한 질병이, 치명적이지도 위험하지도 않더라도 그들 사이에 퍼지지 않도록 막는 것이 정부의 가장 진지한 주의를 받을 만한 것과 같다. 그런 주의에서 그토록 큰 공공의 해악을 막는 것 외에 다른 공공의 이익은 아마 생기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125

문명사회에서 그토록 흔히 모든 하층 계층 사람들의 이해력을 마비시키는 것 같은 심한 무지와 우둔함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가능하다면 겁쟁이보다도 더 경멸스러우며, 인간 본성의 성격 가운데 더욱 본질적인 부분에서 불구이고 기형인 것 같다. 국가가 하층 계층 사람들의 교육에서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완전히 교육받지 못한 채로 있지 않게 하는 것은 여전히 국가의 주의를 받을 만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그들의 교육에서 적지 않은 이익을 얻는다. 그들이 교육을 받을수록 열광과 미신의 망상에 덜 빠지는데, 그 망상은 무지한 국민 사이에서 흔히 가장 무서운 소요를 일으킨다. 게다가 교육받고 지적인 국민은 언제나 무지하고 우둔한 국민보다 더 점잖고 질서 있다. 그들은 각자 자기가 더 존중받을 만하고 합법적인 윗사람들의 존중을 얻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느끼며, 따라서 그 윗사람들을 존중하려는 성향이 더 강하다. 그들은 파벌과 선동의 이기적인 불평을 검토하려는 성향이 더 강하고 그것을 꿰뚫어 볼 능력이 더 있으며, 그런 까닭에 정부의 조치에 대한 무분별하거나 불필요한 반대에 휩쓸릴 가능성이 더 적다. 정부의 안전이 국민이 정부의 행동에 대해 내릴 수 있는 호의적 판단에 크게 달려 있는 자유로운 나라에서는, 국민이 그것에 대해 경솔하거나 변덕스럽게 판단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확실히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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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항 모든 연령의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한 기관의 경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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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연령의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한 기관은 주로 종교 교육을 위한 기관이다. 이것은 그 목적이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좋은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라기보다 내세의 다른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준비시키는 것인 종류의 교육이다. 이 교육을 담은 교리를 가르치는 교사들은 다른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생활 자료를 전적으로 청중의 자발적 기부에 의존할 수도 있고, 그 나라의 법이 그들에게 권리를 주는 다른 어떤 기금, 곧 토지 재산, 십일조나 지조, 정해진 봉급이나 성직록에서 얻을 수도 있다. 그들의 노력, 열성과 근면은 뒤의 처지보다 앞의 처지에서 훨씬 클 가능성이 크다. 이 점에서 새 종교의 교사들은 언제나 오래되고 확립된 체계를 공격하는 데 상당한 이점을 가졌다. 그 체계의 성직자들은 성직록에 안주하여 국민 대다수 사이에서 신앙과 경건의 열기를 유지하기를 소홀히 했고, 나태에 빠져 자기 교회 체제를 방어하는 데조차 어떤 활기찬 노력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확립되고 기본재산이 넉넉한 종교의 성직자들은 흔히 학식 있고 품위 있는 사람이 되어, 젠틀맨의 모든 덕, 또는 젠틀맨의 존경을 받게 할 수 있는 모든 덕을 지닌다. 그러나 그들은 하층 계층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에게 권위와 영향력을 주었고, 아마 그들 종교의 성공과 확립의 원래 원인이었을 좋고 나쁜 자질을 점차 잃기 쉽다. 그런 성직자들은 인기 있고 대담하지만 아마 우둔하고 무지한 열광자 무리에게 공격받을 때, 아시아 남부의 나태하고 나약하고 배부른 국민이 북쪽의 활동적이고 강인하고 굶주린 타타르인의 침략을 받았을 때처럼 완전히 무방비하다고 느낀다. 그런 성직자들은 그런 위급 사태에서 대개 시민 집정자에게 그 적수들을 공공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자로 박해하고 파멸시키거나 몰아내 달라고 호소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책이 없다.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이 시민 집정자에게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해 달라고, 잉글랜드 국교회가 비국교도를 박해해 달라고 호소한 것은 이런 식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 종파는 한두 세기 동안 법적 국교 체제의 안전을 누리고 나면, 자기 교리나 규율을 공격하기로 한 어떤 새 종파에 맞서서도 활기찬 방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경우 학식과 뛰어난 저술의 면에서는 때로 국교회 쪽에 이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중의 인기를 얻는 기술, 개종자를 얻는 모든 기술은 언제나 그 적수들 쪽에 있다. 잉글랜드에서는 그 기술이 국교회의 기본재산 넉넉한 성직자들에게 오랫동안 소홀히 되어 왔으며, 현재는 주로 비국교도와 감리교도가 그것을 갈고닦는다. 그러나 자발적 기부금, 신탁 권리, 그리고 그 밖의 법망 회피 수단으로 많은 곳에서 비국교도 교사들을 위해 마련된 독립된 생계 재원은 그 교사들의 열성과 활동성을 크게 줄인 것 같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가 매우 학식 있고 재간 있으며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체로 매우 인기 있는 설교자이기를 그쳤다. 감리교도는 비국교도의 학식의 절반도 갖추지 못했지만 훨씬 더 인기를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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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회에서는 하급 성직자의 근면과 열성이 아마 어떤 국교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보다 자기 이익이라는 강력한 동기로 더 생생하게 유지된다. 교구 성직자들 가운데 많은 이는 생활 자료의 매우 상당한 부분을 국민의 자발적 헌금에서 얻는다. 이 수입원은 고해성사가 그들에게 늘릴 기회를 많이 준다. 탁발 수도회는 생활 자료 전부를 그런 헌금에서 얻는다. 그들은 어떤 군대의 경기병과 경보병 같다. 약탈이 없으면 급료도 없다. 교구 성직자는 보수가 일부는 봉급에, 일부는 학생들에게서 받는 수업료나 사례금에 달려 있는 교사와 같다. 그리고 이 후자는 언제나 많든 적든 그들의 근면과 명성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 탁발 수도회는 생활 자료가 전적으로 근면에 달려 있는 교사와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일반 서민의 경건을 북돋울 수 있는 모든 기술을 써야 한다. 마키아벨리(Machiavel)가 지적하듯이, 성 도미니쿠스(St Dominic)와 성 프란치스코(St. Francis)의 두 대탁발 수도회의 설립은 13세기와 14세기에 가톨릭교회의 시들어 가던 신앙과 경건을 되살렸다. 로마 가톨릭 나라들에서 경건의 정신은 전적으로 수도사들과 더 가난한 교구 성직자들이 떠받친다.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젠틀맨과 세상 사람의 모든 교양을, 때로는 학자의 교양까지 갖추고 아랫사람들에 대해 필요한 규율을 유지하는 데는 조심하지만, 국민의 교육에 대해서는 좀처럼 아무 수고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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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대의 단연 가장 저명한 철학자이자 역사가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 안의 기술과 직업 대부분은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면서 동시에 어떤 개인들에게도 유용하거나 즐거운 성질의 것이다. 그런 경우 집정자의 변함없는 규칙은, 아마 어떤 기술을 처음 도입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 직업을 그 자체에 맡기고 그 장려를 그 혜택을 거두는 개인들에게 맡기는 것이다. 장인들은 고객의 호의로 이윤이 늘어나는 것을 알기에 될 수 있는 한 기술과 근면을 늘리며, 사물이 어떤 분별없는 간섭으로 교란되지 않으므로, 상품은 언제나 수요에 거의 비례하는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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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가에 유용하고 필요하기까지 하면서도 어떤 개인에게도 이익이나 즐거움을 가져다주지 않는 직업도 있다. 그리고 최고 권력은 그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관해서는 그 처신을 바꾸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생계를 위해 그들에게 공공의 장려를 주어야 하며, 직업에 특별한 영예를 부여하거나, 긴 신분의 위계와 엄격한 종속 관계를 확립하거나, 다른 어떤 방편으로써 그들이 자연히 빠지게 될 태만에 대비해야 한다. 재정, 함대, 사법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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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기에는 성직자가 첫째 부류에 속하며, 그들의 장려도 법률가와 의사의 장려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교리를 신봉하고 그들의 영적 봉사와 도움에서 혜택이나 위안을 얻는 개인들의 너그러움에 안심하고 맡겨도 된다고 자연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근면과 경계심은 물론 그런 추가적 동기로 예리해질 것이며, 그들의 직업적 기술과 사람들의 정신을 다스리는 그들의 수완은 늘어나는 실천과 연구와 주의로 날마다 향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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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문제를 더 자세히 고찰하면, 성직자들의 이런 이해타산적 근면이야말로 모든 현명한 입법자가 막으려 애쓸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참된 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에서 지극히 해로우며, 진리에 미신과 어리석음과 망상을 강하게 섞어 넣음으로써 진리를 왜곡하는 자연적 경향까지 지니기 때문이다. 각 영적 종사자는 자기 추종자들의 눈에 자기를 더 귀하고 신성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다른 모든 종파에 대한 가장 격렬한 혐오를 불어넣고, 어떤 새로움으로써 청중의 시들한 경건을 자극하려고 끊임없이 애쓸 것이다. 가르치는 교리에서 진리, 도덕, 품위는 아무런 고려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인간 본성의 무질서한 감정에 가장 잘 맞는 교의는 무엇이든 채택될 것이다. 민중의 열정과 쉽게 믿는 성질을 이용하는 데서 새로운 근면과 수완으로써 고객들이 각 비밀 집회로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결국 시민 집정자는 사제들을 위한 고정된 체제를 아껴서 의도했던 절약에 대해 비싼 대가를 치렀음을 알게 될 것이며, 실제로 그가 영적 지도자들과 맺을 수 있는 가장 점잖고 유리한 타협은 그들의 직업에 정해진 봉급을 배정하여 그들의 나태를 매수하고, 자기 양 떼가 새 목자를 찾아 헤매지 않도록 막는 것 이상으로 활동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교회 체제는 대개 처음에는 종교적 관점에서 생겨났지만 결국에는 사회의 정치적 이익에 유리한 것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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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직자의 독립적 생계 재원이 어떤 좋거나 나쁜 효과를 냈든, 그것이 그 효과를 염두에 두고 그들에게 주어진 경우는 아마 매우 드물었을 것이다. 격렬한 종교 논쟁의 시기는 대개 똑같이 격렬한 정치적 파벌의 시기였다. 그런 경우 각 정당은 다투는 종교 종파 가운데 이런저런 하나와 동맹하는 것이 자기 이익이라는 것을 알았거나 그렇게 상상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 특정 종파의 교의를 채택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우대함으로써만 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승리한 당파와 동맹한 종파는 필연적으로 그 동맹자의 승리를 함께 나누었으며, 그 동맹자의 호의와 보호로 곧 어느 정도 모든 적수를 침묵시키고 굴복시킬 수 있었다. 그 적수들은 대개 승리한 당파의 적들과 동맹했으므로 그 당파의 적이었다. 이 특정 종파의 성직자들은 이렇게 하여 싸움터의 완전한 주인이 되었고, 국민 대다수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과 권위가 최고의 활력에 이르렀으므로, 자기 당파의 우두머리와 지도자들을 위압하고 시민 집정자에게 자기들의 의견과 성향을 존중하도록 강제할 만큼 강력했다. 그들의 첫째 요구는 대개 그가 그들의 모든 적수를 침묵시키고 굴복시키라는 것이었고, 둘째 요구는 그들에게 독립적 생계 재원을 주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개 승리에 상당히 기여했으므로 전리품의 일부를 갖는 것이 불합리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민중의 비위를 맞추고 생계를 민중의 변덕에 의존하는 데 지쳐 있었다. 그러므로 이 요구를 할 때 그들은 그것이 앞으로 자기 계층의 영향력과 권위에 미칠 수 있는 효과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자기의 편안함과 안락만을 고려했다. 시민 집정자는 자기가 차라리 거두어들이거나 자기에게 남겨 두고 싶은 무언가를 그들에게 줌으로써만 그들의 요구에 응할 수 있었으므로, 그것을 선뜻 들어주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필요는 언제나 결국 그를 굴복시켰다. 다만 흔히 여러 차례의 지연과 회피와 그럴듯한 핑계 뒤에야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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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치가 종교의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고, 승리한 당파가 승리를 얻었을 때 어느 한 종파의 교의를 다른 종파의 교의보다 더 채택하지 않았다면, 그 당파는 아마 모든 종파를 평등하고 공정하게 대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 사제와 자기 종교를 적절하다고 여기는 대로 선택하도록 허용했을 것이다. 이 경우 틀림없이 매우 많은 종교 종파가 있었을 것이다. 거의 모든 회중이 아마 저마다 작은 종파를 이루거나 저마다 어떤 특유한 교의를 품었을 것이다. 각 교사는 틀림없이 자기 제자의 수를 유지하고 늘리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모든 기술을 쓸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교사도 같은 필요를 느꼈을 것이므로, 어느 한 교사나 한 교사 종파의 성공도 그다지 클 수 없었을 것이다. 종교 교사들의 이해타산적이고 활발한 열성이 위험하고 성가실 수 있는 것은, 사회에서 단 하나의 종파만 용인되는 곳이나, 큰 사회 전체가 두세 개의 큰 종파로 나뉘어 각 종파의 교사들이 협조하며 정규적인 규율과 종속 아래 행동하는 곳에서뿐이다. 그러나 사회가 2, 3백 개, 또는 아마 그만큼 수천 개의 작은 종파로 나뉘어 그 어느 것도 공공의 평온을 어지럽힐 만큼 크지 않은 곳에서는 그 열성은 완전히 무해할 수밖에 없다. 각 종파의 교사들은 자기가 사방에서 친구보다 적수에 더 많이 둘러싸여 있음을 보고, 큰 종파의 교사들 사이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공정함과 절제를 배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큰 종파의 교의는 시민 집정자의 지지를 받아 광대한 왕국과 제국의 거의 모든 주민에게 숭배받으며, 그 교사들은 따라서 주위에서 추종자와 제자와 비천한 찬미자밖에 보지 못한다. 각 작은 종파의 교사들은 자기가 거의 혼자임을 알고, 거의 다른 모든 종파의 교사들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에게 하는 것이 편리하고 즐겁다고 알게 될 양보는 아마 때가 되면 그 대부분의 교리를, 모든 시대의 현자들이 확립되기를 바랐지만 실정법이 아마 어느 나라에서도 아직 확립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확립하지 않을 것 같은, 모든 불합리와 사기와 광신의 혼합에서 벗어난 순수하고 합리적인 종교로 환원할 것이다. 종교에 관해서 실정법은 언제나 많든 적든 대중의 미신과 열광의 영향을 받아 왔고, 아마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 통치의 계획, 더 정확히 말하면 교회 통치가 없는 계획은 이른바 독립파(Independents)라는 종파(틀림없이 매우 과격한 열광자들의 종파)가 내전 말기에 잉글랜드에서 확립하려고 제안한 것이었다. 그것이 확립되었다면, 매우 비철학적인 기원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쯤 아마 모든 종류의 종교적 원칙에 관해 가장 철학적인 온건함과 절제를 낳았을 것이다. 그것은 펜실베이니아에서 확립되었다. 그곳에서는 마침 퀘이커교도가 가장 많지만, 법은 실제로 어느 한 종파를 다른 종파보다 더 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것이 이런 철학적 온건함과 절제를 낳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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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평등한 대우가 어느 특정 나라의 모든 종교 종파, 또는 그 대부분에서조차 이런 온건함과 절제를 낳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종파들이 충분히 많아서 각각이 공공의 평온을 어지럽히기에는 너무 작다면, 자기 특정 교의에 대한 각 종파의 지나친 열성은 그다지 해로운 효과를 낳기 어렵고, 오히려 몇 가지 좋은 효과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정부가 그들을 모두 내버려 두고, 그들 모두가 서로를 내버려 두도록 강제하기로 완전히 결심한다면, 그들이 저절로 충분히 빨리 분열하여 곧 충분히 많아지지 않을 위험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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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명사회, 곧 신분의 구별이 일단 완전히 확립된 모든 사회에는 언제나 두 가지 다른 도덕 체계가 동시에 통용되어 왔다. 하나는 엄격한 또는 금욕적인 체계라 부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너그러운, 또는 원한다면 느슨한 체계라 부를 수 있다. 전자는 대개 일반 서민이 찬탄하고 숭배하며, 후자는 대개 이른바 상류층 사람들이 더 높이 평가하고 채택한다. 경박의 악덕, 곧 큰 번영과 지나친 쾌활함과 유쾌함에서 생기기 쉬운 악덕을 우리가 얼마나 강하게 비난해야 하느냐가 그 두 상반된 체계 사이의 주된 구별을 이루는 것 같다. 너그러운 또는 느슨한 체계에서는 사치, 방자하고 심지어 무질서한 흥청거림, 어느 정도 무절제에 이르는 쾌락 추구, 적어도 두 성 가운데 한쪽의 정조 위반 등은, 심한 추잡함을 수반하지 않고 거짓과 불의로 이어지지 않는 한, 대개 상당히 관대하게 다루어지며 쉽게 변명되거나 완전히 용서된다. 반대로 금욕적인 체계에서는 그런 방종이 가장 큰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된다. 경박의 악덕은 언제나 일반 서민을 파멸시키며, 단 한 주의 무분별과 방탕이 흔히 가난한 노동자를 영원히 망치고 절망 속에서 가장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몰아가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일반 서민 가운데 더 지혜롭고 더 나은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방종에 대해 가장 큰 혐오와 증오를 품는다. 그들의 경험은 그것이 자기 처지의 사람들에게 그토록 즉각 치명적이라고 말해 주기 때문이다. 반대로 여러 해의 무질서와 낭비도 상류층 사람을 언제나 파멸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신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방종에 빠질 수 있는 힘을 자기 재산의 이점 가운데 하나로, 비난이나 질책 없이 그렇게 할 자유를 자기 지위에 속하는 특권 가운데 하나로 여기기 매우 쉽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신분의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방종을 조금만 못마땅하게 여기며, 아주 가볍게 비난하거나 전혀 비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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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종교 종파는 일반 서민 사이에서 시작되었으며, 대개 그들에게서 최초의 개종자뿐 아니라 가장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래서 금욕적인 도덕 체계가 그 종파들에 의해 거의 언제나, 또는 아주 적은 예외만 빼고 채택되었다. 예외가 몇 가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이전에 확립되어 있던 것에 대한 개혁 계획을 처음 제안한 그 계층 사람들에게 자기를 가장 잘 권할 수 있는 체계였다. 그들 가운데 많은 종파, 아마 대부분은 이 금욕적 체계를 더 세련되게 다듬고 그것을 어느 정도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데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신망을 얻으려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지나친 엄격함이 흔히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을 일반 서민의 존경과 숭배를 받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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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과 재산이 있는 사람은 그 지위 때문에 큰 사회의 두드러진 구성원이며, 그 사회는 그의 행동의 모든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로써 그 자신도 행동의 모든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강제한다. 그의 권위와 위신은 이 사회가 그에게 바치는 존경에 크게 달려 있다. 그는 그 사회에서 자기를 욕되게 하거나 신용을 잃게 할 일은 감히 하지 못하며, 이 사회의 일반적 동의가 그의 신분과 재산의 사람들에게 정해 주는 종류의 도덕을, 그것이 너그러운 것이든 금욕적인 것이든, 매우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 반대로 낮은 처지의 사람은 어떤 큰 사회의 두드러진 구성원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시골 마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의 행동이 주목받을 수 있고, 그 자신도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강제될 수 있다. 이런 처지에서, 그리고 오직 이런 처지에서만 그는 이른바 잃을 평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대도시에 오자마자 그는 무명과 어둠 속에 가라앉는다. 그의 행동은 아무에게도 관찰되거나 주목받지 않으며, 그러므로 그 자신도 그것을 소홀히 하고 온갖 종류의 비천한 방탕과 악덕에 몸을 맡기기 매우 쉽다. 그가 이 무명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벗어나고, 그의 행동이 어떤 존경할 만한 사회의 주의를 가장 많이 끄는 것은 작은 종교 종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을 통해서다. 그는 그 순간부터 전에는 결코 갖지 못했던 정도의 위신을 얻는다. 그의 모든 종파 형제들은 종파의 신용을 위해 그의 행동을 지켜보는 데 이해관계를 가지며, 그가 어떤 추문의 계기가 되거나, 그들이 거의 언제나 서로에게 요구하는 금욕적 도덕에서 크게 벗어나면, 아무런 나쁜 결과가 따르지 않는 경우에도 언제나 매우 가혹한 처벌인 종파로부터의 추방이나 파문으로 그를 처벌하는 데 이해관계를 가진다. 그래서 작은 종교 종파에서는 일반 서민의 도덕이 거의 언제나 두드러지게 규칙적이고 질서 있었으며, 대개 국교회에서보다 훨씬 그러했다. 물론 그 작은 종파들의 도덕은 흔히 오히려 불쾌할 만큼 엄격하고 비사교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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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매우 쉽고 효과적인 두 가지 처방이 있으며, 그 공동 작용으로 국가는 폭력 없이 나라가 나뉜 모든 작은 종파의 도덕에서 비사교적이거나 불쾌할 만큼 엄격한 것이 무엇이든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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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처방의 첫째는 학문과 철학의 공부다. 국가는 그것을 중간 또는 중간 이상의 신분과 재산을 지닌 모든 사람들 사이에 거의 보편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교사들을 태만하고 게으르게 만들도록 그들에게 봉급을 줌으로써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어떤 자유 전문직에 종사하도록 허락받기 전에, 또는 신임과 이익이 따르는 어떤 명예로운 공직의 후보로 받아들여지기 전에 더 높고 더 어려운 학문에서조차 일종의 검정을 받도록 함으로써다. 국가가 이 계층 사람들에게 배울 필요를 지운다면, 그들에게 적절한 교사를 마련해 주는 데 아무런 수고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곧 국가가 마련해 줄 수 있는 어떤 교사보다 나은 교사를 스스로 찾을 것이다. 학문은 열광과 미신이라는 독에 대한 큰 해독제다. 그리고 모든 상층 계층 사람들이 그것으로부터 보호받는 곳에서는 하층 계층도 그것에 크게 노출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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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처방의 둘째는 공공 오락의 잦음과 즐거움이다. 국가가 자기 이익을 위해 추문이나 외설 없이 그림, 시, 음악, 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연극 공연과 전시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기분 전환을 시켜 주려는 모든 사람을 장려함으로써, 곧 그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줌으로써, 사람들 대부분에게서 거의 언제나 대중적 미신과 열광의 유모인 그 우울하고 음침한 기질을 쉽게 흩어 버릴 것이다. 공공 오락은 언제나 그런 대중적 광란을 부추기는 모든 광신적 선동가들에게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 오락이 불러일으키는 즐거움과 유쾌함은 그들의 목적에 가장 알맞은, 또는 그들이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는 정신 상태와 전혀 양립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연극 공연은 흔히 그들의 술책을 공공의 조롱에, 때로는 공공의 저주에까지 드러냈으므로, 그런 까닭에 다른 모든 오락보다도 그들이 특히 혐오하는 대상이었다.

142

법이 어느 한 종교의 교사를 다른 종교의 교사보다 더 우대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그 가운데 누구도 군주나 행정권에 특별하거나 직접적으로 의존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군주가 그들을 직책에 임명하거나 해임하는 일에 관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 처지에서 군주는 다른 신민들 사이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그들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 곧 그들이 서로 박해하고 학대하고 억압하지 못하게 막는 것 이상으로 그들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교나 지배적 종교가 있는 나라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이 경우 군주는 그 종교의 교사 대부분에게 상당한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단을 갖지 않는 한 결코 안전할 수 없다.

143

모든 국교회의 성직자들은 하나의 큰 법인체를 이룬다. 그들은 협조하여 행동할 수 있으며, 마치 한 사람의 지휘 아래 있는 것처럼 하나의 계획과 하나의 정신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흔히 실제로 그런 지휘 아래 있다. 법인체로서 그들의 이익은 결코 군주의 이익과 같지 않으며, 때로는 정면으로 대립한다. 그들의 큰 이익은 국민에 대한 자기 권위를 유지하는 것이며, 이 권위는 그들이 가르치는 교리 전체가 확실하고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과, 영원한 불행을 피하기 위해 그 모든 부분을 가장 맹목적인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겨지는 것에 달려 있다. 군주가 경솔하게도 그들 교리의 가장 사소한 부분이라도 조롱하거나 스스로 의심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인정에서 그 어느 쪽이든 한 사람들을 보호하려 한다면, 그에게 아무런 의존 관계도 없는 성직자들의 까다로운 명예심은 즉시 자극되어 그를 불경한 자로 선고하고, 종교의 모든 공포를 동원하여 국민이 더 정통적이고 순종적인 다른 군주에게 충성을 옮기도록 강제한다. 그가 그들의 어떤 주장이나 찬탈에 반대하더라도 위험은 똑같이 크다. 감히 이런 식으로 교회에 반항한 군주들은 이 반항의 죄 외에도, 엄숙한 신앙 고백과 교회가 그들에게 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긴 모든 교의에 대한 겸손한 복종에도 불구하고, 대개 이단이라는 추가적인 죄로 고발되었다. 그런데 종교의 권위는 다른 모든 권위보다 우월하다.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압도한다. 공인된 종교 교사들이 군주의 권위를 뒤엎는 교리를 국민 대다수에게 퍼뜨릴 때, 그가 자기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폭력, 곧 상비군의 힘에 의해서다. 이 경우 상비군조차 그에게 지속적인 안전을 줄 수 없다. 병사들이 외국인이 아니라면—그런 경우는 드물다—국민 대다수에서 뽑힌 사람들이라면—거의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다—그들은 곧 바로 그 교리에 물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동로마 제국이 존속하는 동안 그리스 성직자들의 소란이 콘스탄티노플에서 끊임없이 일으킨 혁명들, 그리고 여러 세기에 걸쳐 로마 성직자들의 소란이 유럽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으킨 격동은, 자기 나라의 국교이자 지배적 종교의 성직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적절한 수단을 갖지 못한 군주의 처지가 언제나 얼마나 불안정하고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지를 충분히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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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조항은 다른 모든 영적 문제와 마찬가지로 세속 군주의 본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분명하다. 군주는 국민을 보호하는 데는 매우 적합할 수 있지만, 국민을 가르치는 데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일은 드물다. 그러므로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그의 권위가 국교회 성직자들의 결합된 권위를 상쇄하기에 충분한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공공의 평온과 그 자신의 안전은 흔히 그들이 그런 문제에 관해 퍼뜨리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기는 교리에 달려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결정에 적절한 무게와 권위로 직접 맞서는 경우가 드물므로, 그것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그 계층의 개인 대부분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두려움과 기대로써만 그것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 두려움과 기대는 성직 박탈이나 다른 처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더 높은 승진에 대한 기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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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성직자의 성직록은 일종의 자유 보유 재산이며, 그들은 그것을 임명권자의 뜻에 따라서가 아니라 종신 또는 품행이 방정한 동안 누린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더 불안정한 조건으로 보유하여, 군주나 그 대신들의 조그만 비위에도 쫓겨날 수 있다면, 그들은 아마 국민에 대한 권위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국민은 그때 그들을 궁정에 의존하는 고용된 자들로 여길 것이고, 그들 가르침의 진실성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군주가 아마 어떤 당파적이거나 선동적인 교리를 보통 이상의 열성으로 퍼뜨렸다는 이유로 상당수의 성직자에게서 그 자유 보유 재산을 불법적으로, 폭력으로 빼앗으려 한다면, 그는 그런 박해로 그들과 그들의 교리를 이전보다 열 배는 더 인기 있게, 따라서 열 배는 더 성가시고 위험하게 만들 뿐일 것이다. 두려움은 거의 모든 경우에 비참한 통치 도구이며, 특히 독립에 대한 조금의 주장이라도 가진 어떤 계층의 사람들에게든 결코 써서는 안 된다. 그들을 겁주려 하는 것은 그들의 나쁜 기분을 자극하고, 더 부드러운 대우였다면 아마 쉽게 누그러뜨리거나 완전히 그만두게 할 수 있었을 반대를 더 굳히게 할 뿐이다. 프랑스 정부가 모든 고등법원, 곧 최고 법원에 인기 없는 칙령을 등록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보통 쓴 폭력은 성공한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보통 쓰인 수단, 곧 반항하는 모든 의원의 투옥은 충분히 강제적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스튜어트 가문의 군주들은 때로 잉글랜드 의회의 일부 의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비슷한 수단을 썼으며, 대개 그들이 똑같이 다루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잉글랜드 의회는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관리된다. 그리고 약 12년 전 슈아죌 공작(duke of Choiseul)이 파리 고등법원에 대해 한 매우 작은 실험은 프랑스의 모든 고등법원도 같은 방식으로 더욱 쉽게 관리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증명했다. 그 실험은 계속되지 않았다. 관리와 설득이 언제나 가장 쉽고 가장 안전한 통치 도구이고 강제와 폭력이 가장 나쁘고 가장 위험한 도구인데도, 인간의 타고난 오만은 그런 것인지, 그는 나쁜 도구를 쓸 수 없거나 감히 쓰지 못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언제나 좋은 도구를 쓰기를 경멸한다. 프랑스 정부는 강제력을 쓸 수 있었고 감히 쓸 수 있었으므로, 관리와 설득을 쓰기를 경멸했다. 그러나 모든 시대의 경험으로 보아, 국교회의 존경받는 성직자들만큼 강제와 폭력을 쓰는 것이 위험한, 아니 완전히 파멸적인 계층의 사람은 없다고 나는 믿는다. 자기 계층과 사이가 좋은 모든 개별 성직자의 권리, 특권, 개인적 자유는 가장 전제적인 정부에서조차 거의 같은 신분과 재산을 지닌 다른 어떤 사람의 것보다 더 존중된다. 파리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정부에서부터 콘스탄티노플의 난폭하고 맹렬한 정부에 이르기까지 전제정의 모든 단계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이 계층의 사람들은 거의 강제될 수 없지만, 다른 어떤 계층만큼 쉽게 관리될 수 있다. 그리고 군주의 안전과 공공의 평온은 그가 그들을 관리할 수 있는 수단에 크게 달려 있는 것 같으며, 그 수단은 전적으로 그가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승진에 있는 것 같다.

146

그리스도교 교회의 옛 구조에서 각 교구의 주교는 주교좌 도시의 성직자와 주민의 공동 투표로 선출되었다. 주민은 그 선거권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동안에도 거의 언제나 성직자의 영향 아래 행동했다. 그런 영적 문제에서는 성직자가 그들의 자연스러운 안내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곧 주민을 관리하는 수고에 싫증이 났고, 자기 주교를 스스로 선출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았다. 마찬가지로 대수도원장은, 적어도 대부분의 대수도원에서는 그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선출했다. 교구 안에 포함된 모든 하급 교회 성직록은 주교가 수여했으며, 주교는 그것을 적절하다고 여기는 성직자에게 주었다. 모든 교회 승진은 이렇게 교회의 처분에 맡겨져 있었다. 군주는 그 선거에 얼마간의 간접적 영향력을 가졌을지 모르고, 때로는 선거에 대한 그의 동의와 선거 결과에 대한 그의 승인을 구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성직자를 관리할 직접적이거나 충분한 수단은 없었다. 모든 성직자의 야심은 자연히 그로 하여금 군주보다는 자기 계층에 환심을 사도록 이끌었다. 그가 승진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자기 계층에서뿐이었기 때문이다.

147

유럽의 대부분 지역에서 교황은 점차 자기에게로, 먼저 거의 모든 주교직과 대수도원장직, 곧 이른바 추기경 회의 성직록(consistorial benefices)의 수여권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는 여러 가지 술책과 구실로 각 교구 안에 포함된 하급 성직록 대부분의 수여권도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주교에게는 자기 성직자들에 대해 체면을 세울 만한 권위를 주는 데 겨우 필요한 것 정도만 남았다. 이 배치로 군주의 처지는 이전보다 더욱 나빠졌다. 유럽 여러 나라의 성직자들은 이렇게 하여 일종의 영적 군대로 편성되었다. 물론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지만, 이제 그 모든 움직임과 작전을 한 우두머리가 지휘하고 하나의 통일된 계획에 따라 수행할 수 있었다. 각 특정 나라의 성직자는 그 군대의 한 특정 분견대로 볼 수 있었으며, 그 작전은 주변의 여러 나라에 주둔한 다른 모든 분견대가 쉽게 지원하고 거들 수 있었다. 각 분견대는 그것이 주둔하고 그것을 부양하는 나라의 군주로부터 독립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언제든 그 무기를 그 특정 나라의 군주에게 돌리고 다른 모든 분견대의 무기로 그것을 지원할 수 있는 외국 군주에게 의존했다.

148

그 무기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것이었다. 기술과 제조업이 확립되기 전 유럽의 옛 상태에서 성직자의 부는 대영주들의 부가 각자의 가신, 차지인, 종자들에 대해 그들에게 준 것과 같은 종류의 영향력을 일반 서민에 대해 성직자에게 주었다. 군주와 개인들의 그릇된 경건이 교회에 기증한 큰 토지 재산에는 대영주의 재판권과 같은 종류의 재판권이 같은 이유로 확립되었다. 그 큰 토지 재산에서 성직자나 그 집행관은 왕이나 다른 누구의 지원이나 도움 없이도 쉽게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왕도 다른 누구도 성직자의 지원과 도움 없이는 그곳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각자의 남작령이나 장원에서 성직자의 재판권은 세속 대영주들의 재판권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이었고, 마찬가지로 왕실 법원의 권위를 배제했다. 성직자의 차지인들은 대영주들의 차지인들처럼 거의 모두 임의 차지인으로서 직속 영주에게 전적으로 의존했으며, 따라서 성직자가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기는 어떤 분쟁에서든 싸우도록 마음대로 소집될 수 있었다. 그 재산의 지대 외에도, 성직자는 십일조로 유럽 모든 왕국의 다른 모든 재산 지대의 매우 큰 부분을 소유했다. 그 두 종류의 지대에서 생기는 수입은 대부분 곡물, 포도주, 가축, 가금 등의 현물로 지급되었다. 그 양은 성직자가 스스로 소비할 수 있는 것을 크게 넘었으며, 그 잉여를 교환할 수 있는 생산물을 내는 기술도 제조업도 없었다. 성직자는 대영주들이 자기 수입의 비슷한 잉여를 썼던 것처럼, 그것을 가장 아낌없는 환대와 가장 광범한 자선에 쓰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이 막대한 잉여에서 이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옛 성직자의 환대와 자선은 모두 매우 컸다고 한다. 그들은 모든 왕국의 빈민 거의 전부를 부양했을 뿐 아니라, 많은 기사와 젠틀맨은 흔히 경건을 구실로, 그러나 실제로는 성직자의 환대를 누리기 위해 수도원에서 수도원으로 돌아다니는 것 외에는 다른 생계 수단이 없었다. 몇몇 특정 고위 성직자의 종자는 흔히 가장 큰 세속 영주의 종자만큼 많았다. 그리고 모든 성직자의 종자를 합치면 아마 모든 세속 영주의 종자보다 많았을 것이다. 성직자 사이에는 언제나 세속 영주들 사이보다 훨씬 많은 단결이 있었다. 전자는 교황의 권위에 대한 정규적인 규율과 종속 아래 있었다. 후자는 아무런 정규적 규율이나 종속 아래 있지 않았고, 거의 언제나 서로를, 그리고 왕을 똑같이 경계했다. 그러므로 성직자의 차지인과 종자를 합친 수가 세속 대영주들의 그것보다 적었다 하더라도—그리고 그들의 차지인은 아마 훨씬 적었을 것이다—그들의 단결이 그들을 더 무섭게 만들었을 것이다. 또한 성직자의 환대와 자선은 그들에게 큰 세속적 힘의 지휘권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영적 무기의 무게를 크게 늘렸다. 그 덕은 모든 하층 계층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에게 최고의 존경과 숭배를 얻어 주었다. 그 가운데 많은 이는 늘, 거의 모든 이는 이따금 그들에게서 먹을 것을 얻었다. 그토록 인기 있는 계층에 속하거나 관계된 모든 것, 곧 그 소유물, 특권, 교리는 필연적으로 일반 서민의 눈에 신성하게 보였으며, 그것에 대한 모든 침해는, 실제이든 거짓이든, 신성 모독적인 사악함과 불경의 극치로 보였다. 이런 상태에서 군주가 몇몇 대귀족의 연합에 저항하기도 흔히 어렵다고 느꼈다면, 이웃 모든 영토 성직자들의 지원을 받는 자기 영토 성직자들의 결합된 힘에 저항하기가 더욱 어렵다고 느낀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놀라운 것은 그가 때로 굴복해야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도대체 저항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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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 시절 성직자의 특권(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는 가장 불합리해 보이는 것), 예컨대 세속 재판권으로부터의 완전한 면제, 곧 잉글랜드에서 이른바 성직자 특권은 이런 상태의 자연스러운, 아니 필연적인 결과였다. 성직자의 계층이 그를 보호하려 하고, 그토록 거룩한 사람을 유죄로 판정하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거나, 종교로 신성해진 몸에 가하기에는 처벌이 너무 가혹하다고 주장한다면, 군주가 어떤 범죄로든 성직자를 처벌하려 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했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군주는 그를 교회 법원의 재판에 맡기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었다. 교회 법원은 자기 계층의 명예를 위해, 그 구성원 누구든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거나, 심지어 국민의 마음을 불쾌하게 할 만한 심한 추문의 계기를 주는 것까지 될 수 있는 한 억제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었다.

150

10, 11, 12, 13세기 동안, 그리고 그 시기 전후의 얼마 동안 유럽 대부분 지역의 사정에서, 로마 교회의 구조는 시민 정부의 권위와 안전에 맞서, 그리고 시민 정부가 보호할 수 있는 곳에서만 번영할 수 있는 인류의 자유, 이성, 행복에 맞서 형성된 결합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구조에서는 미신의 가장 심한 망상이 그토록 많은 사람의 사적 이익에 의해 떠받쳐져서 인간 이성의 어떤 공격으로부터도 완전히 안전했다. 인간 이성은 아마 일반 서민의 눈에조차 미신의 망상 일부를 벗겨 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사적 이익의 유대를 결코 풀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구조가 인간 이성의 미약한 노력 외에 다른 어떤 적에게도 공격받지 않았다면,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지혜와 덕으로도 결코 흔들 수 없었고 하물며 뒤엎을 수는 더욱 없었을 그 거대하고 잘 지어진 건축물은 사물의 자연스러운 경과에 의해 먼저 약해졌고, 그다음 일부가 파괴되었으며, 이제 아마 몇 세기 더 지나면 완전히 무너져 폐허가 될 것 같다.

151

기술과 제조업과 상업의 점진적 개량, 곧 대영주들의 권력을 파괴한 바로 그 원인이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같은 방식으로 성직자의 세속 권력 전체를 파괴했다. 기술과 제조업과 상업의 생산물에서 성직자는 대영주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원생산물과 교환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으며, 그로써 수입 전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상당한 몫을 나누어 주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쓸 수단을 발견했다. 그들의 자선은 점차 덜 광범해졌고, 그들의 환대는 덜 너그럽거나 덜 아낌없어졌다. 따라서 그들의 종자는 줄어들었고, 점차 완전히 사라졌다. 성직자도 대영주들처럼 같은 방식으로 자기의 사적 허영과 어리석음을 충족하는 데 쓰기 위해 토지 재산에서 더 나은 지대를 얻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 지대 증가는 차지인들에게 임차 계약을 줌으로써만 얻을 수 있었고, 차지인들은 그로써 상당 부분 그들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하층 계층 사람들을 성직자에게 묶어 두던 이해관계의 유대는 이렇게 점차 끊어지고 풀렸다. 그것은 같은 계층의 사람들을 대영주들에게 묶어 두던 유대보다 오히려 더 일찍 끊어지고 풀렸다. 교회의 성직록은 대부분 대영주들의 영지보다 훨씬 작았으므로, 각 성직록의 보유자는 훨씬 일찍 그 수입 전부를 자기 자신에게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14세기와 15세기의 대부분 동안 대영주들의 권력은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최고의 활력 속에 있었다. 그러나 성직자의 세속 권력, 곧 그들이 한때 국민 대다수에 대해 가졌던 절대적 지배력은 크게 쇠퇴해 있었다. 그때쯤 교회의 권력은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그들의 영적 권위에서 생기는 것으로 거의 축소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영적 권위조차 성직자의 자선과 환대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게 되자 크게 약해졌다. 하층 계층 사람들은 더 이상 그 계층을 이전처럼 자기 고통의 위로자이자 자기 궁핍의 구제자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부유한 성직자들의 허영과 사치와 낭비에 분노하고 혐오감을 느꼈다. 그 성직자들은 이전에는 언제나 빈민의 세습 재산으로 여겨졌던 것을 자기 쾌락에 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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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정에서 유럽 여러 나라의 군주들은 교회의 큰 성직록 처분에 대해 한때 가졌던 영향력을 되찾으려 애썼다. 각 교구의 주임 사제와 성당 참사회에 주교를 선출하는 옛 권리를, 각 대수도원의 수도사들에게 대수도원장을 선출하는 옛 권리를 되찾아 줌으로써였다. 이 옛 질서를 다시 확립하는 것이 14세기 동안 잉글랜드에서 제정된 여러 법령, 특히 이른바 성직 예약 금지법(statute of provisors)의 목적이었고, 15세기 프랑스에서 확립된 국사 조칙(pragmatic sanction)의 목적이었다. 선거를 유효하게 만들려면 군주가 미리 그것에 동의하고 나중에 선출된 사람을 승인해야 했다. 그리고 선거는 여전히 자유롭다고 여겨졌지만, 군주는 자기 처지가 필연적으로 그에게 주는 모든 간접적 수단으로 자기 영토의 성직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비슷한 경향의 다른 규정이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도 확립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큰 성직록 수여에서 교황의 권력이 종교개혁 이전에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만큼 효과적이고 보편적으로 제한된 곳은 없었던 것 같다. 나중에 16세기의 정교 협약(concordat)은 프랑스 국왕들에게 갈리아 교회의 모든 큰 성직록, 곧 이른바 추기경 회의 성직록에 대한 절대적 추천권을 주었다.

153

국사 조칙과 정교 협약이 확립된 이후 프랑스 성직자들은 대체로 다른 어느 가톨릭 국가의 성직자보다 교황청의 교령을 덜 존중해 왔다. 그들의 군주가 교황과 벌인 모든 분쟁에서 그들은 거의 언제나 군주의 편을 들었다. 로마 교황청에 대한 프랑스 성직자의 이 독립성은 주로 국사 조칙과 정교 협약에 기초한 것 같다. 군주국 초기에 프랑스 성직자들은 다른 어느 나라 성직자만큼 교황에게 헌신했던 것 같다. 카페 왕조의 둘째 군주 로베르(Robert)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매우 부당하게 파문되었을 때, 그의 하인들은 그의 식탁에서 나온 음식을 개에게 던져 주고, 그런 처지의 사람과 접촉하여 더럽혀진 것은 무엇이든 스스로 맛보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가르친 것은 그 자신의 영토의 성직자들이었으리라고 매우 안전하게 추정할 수 있다.

154

교회의 큰 성직록을 수여할 권리, 곧 그것을 지키기 위해 로마 교황청이 흔히 그리스도교 세계의 가장 위대한 군주 몇몇의 왕좌를 흔들고 때로는 뒤엎기까지 한 그 권리는, 이렇게 종교개혁 시대 이전에도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제한되거나 수정되거나 완전히 포기되었다. 성직자가 이제 국민에 대해 영향력을 덜 가졌으므로, 국가는 성직자에 대해 더 많은 영향력을 가졌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국가를 어지럽힐 힘도 의향도 모두 줄어들었다.

155

종교개혁을 낳은 논쟁이 독일에서 시작되어 곧 유럽 곳곳으로 퍼졌을 때, 로마 교회의 권위는 이런 쇠퇴 상태에 있었다. 새 교리는 어디서나 높은 대중적 호응을 받았다. 그것은 당파 정신이 확립된 권위를 공격할 때 흔히 그것을 북돋우는 그 모든 열광적 열성으로 전파되었다. 그 교리의 교사들은 아마 다른 면에서는 국교회를 옹호한 많은 신학자보다 더 학식이 있지는 않았겠지만, 대체로 교회사, 그리고 교회의 권위가 확립된 기초인 의견 체계의 기원과 발전을 더 잘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로써 그들은 거의 모든 논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그들 풍속의 엄격함은 일반 서민에게 그들의 권위를 주었다. 일반 서민은 그들 행동의 엄격한 규칙성을 자기 성직자 대부분의 무질서한 생활과 대조했다. 그들은 또한 대중의 인기를 얻고 개종자를 얻는 모든 기술을 적수들보다 훨씬 높은 정도로 갖추고 있었다. 그 기술은 고상하고 위엄 있는 교회의 아들들이 자기들에게는 대체로 쓸모없다 하여 오랫동안 소홀히 해 온 것이었다. 새 교리의 합리성이 어떤 사람들에게, 그 새로움이 많은 사람들에게, 국교회 성직자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 교리가 거의 어디서나 가르쳐질 때의 열성적이고 열정적이며 광신적인—흔히 거칠고 투박하기는 했지만—웅변이 단연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권했다.

156

새 교리의 성공은 거의 어디서나 매우 커서, 당시 마침 로마 교황청과 사이가 나빴던 군주들은 그것 덕분에 자기 영토에서 쉽게 교회를 뒤엎을 수 있었다. 하층 계층 사람들의 존경과 숭배를 잃은 교회는 거의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로마 교황청은 독일 북부의 몇몇 작은 군주들의 비위를 거슬렀는데, 아마 그들을 관리할 가치가 없을 만큼 하찮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자기 영토에 종교개혁을 확립했다. 크리스티안 2세(Christiern II)와 웁살라 대주교 트롤레(Troll)의 폭정은 구스타브 바사(Gustavus Vasa)가 그 둘을 모두 스웨덴에서 몰아낼 수 있게 했다. 교황은 그 폭군과 대주교를 편들었고, 구스타브 바사는 스웨덴에 종교개혁을 확립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았다. 크리스티안 2세는 나중에 덴마크 왕좌에서도 폐위되었는데, 그곳에서도 그의 행동은 스웨덴에서만큼 그를 미움받게 했다. 그러나 교황은 여전히 그를 편들려 했다. 그리고 그 대신 왕위에 오른 홀슈타인의 프레데리크(Frederic of Holstein)는 구스타브 바사의 본을 따름으로써 복수했다. 교황과 특별한 분쟁이 없었던 베른과 취리히의 집정관들은 각자의 칸톤에 매우 쉽게 종교개혁을 확립했다. 그곳에서는 바로 그 직전에 일부 성직자들이 보통보다 다소 심한 사기로 그 계층 전체를 미움받고 경멸받게 만들었던 것이다.

157

이 위기 상황에서 교황청은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강력한 군주들의 우의를 얻으려고 충분히 애썼다. 그 가운데 후자는 당시 독일 황제였다. 그들의 도움으로 교황청은 큰 어려움과 많은 유혈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 영토에서 종교개혁의 진행을 완전히 억누르거나 크게 방해할 수 있었다. 교황청은 잉글랜드 국왕에게도 기꺼이 호의를 보이려 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정상 그렇게 하면 더 큰 군주, 곧 에스파냐 국왕이자 독일 황제인 카를 5세(Charles V)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헨리 8세는 종교개혁 교리의 대부분을 스스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 교리가 널리 퍼진 덕분에 모든 수도원을 해산하고 자기 영토에서 로마 교회의 권위를 폐지할 수 있었다. 그가 그 이상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그만큼이라도 나아갔다는 것이 종교개혁 옹호자들에게 얼마간 만족을 주었으며, 그들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의 치세에 정권을 장악하여 헨리 8세가 시작한 일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완성했다.

158

스코틀랜드처럼 정부가 약하고 인기가 없으며 그다지 확고히 확립되지 않은 몇몇 나라에서는, 종교개혁이 교회뿐 아니라, 교회를 떠받치려 했다는 이유로 국가까지 뒤엎을 만큼 강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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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여러 나라에 흩어진 종교개혁 추종자들 사이에는 로마 교황청이나 공의회처럼 그들 사이의 모든 분쟁을 해결하고 저항할 수 없는 권위로 그들 모두에게 정통의 정확한 한계를 정해 줄 수 있는 일반 법정이 없었다. 그러므로 한 나라의 종교개혁 추종자들이 다른 나라의 형제들과 의견이 달라지면, 호소할 공동의 재판관이 없으므로 그 분쟁은 결코 결정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그런 분쟁이 많이 일어났다. 교회의 통치와 교회 성직록을 수여할 권리에 관한 분쟁이 아마 시민 사회의 평화와 복지에 가장 큰 관심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종교개혁 추종자들 사이의 두 주요 당파 또는 종파, 곧 루터파와 칼뱅파를 낳았다. 그것은 그들 가운데 그 교리와 규율이 지금까지 유럽 어디에서든 법으로 확립된 유일한 종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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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추종자들은 이른바 잉글랜드 국교회와 함께 주교제 통치를 많든 적든 보존했고, 성직자 사이에 종속 관계를 확립했으며, 군주에게 그 영토 안의 모든 주교직과 다른 추기경 회의 성직록의 처분권을 주어 그로써 그를 교회의 실질적 수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주교에게서 그 교구 안의 작은 성직록을 수여할 권리를 빼앗지 않으면서도, 그 성직록에 대해서조차 군주와 다른 모든 평신도 성직 추천권자의 추천권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우대했다. 이 교회 통치 체계는 처음부터 평화와 좋은 질서, 그리고 시민 군주에 대한 복종에 유리했다. 그래서 그것은 일단 확립된 어느 나라에서도 소요나 내란의 계기가 된 적이 없다. 특히 잉글랜드 국교회는 언제나 그 원칙의 흠잡을 데 없는 충성을 매우 정당하게 자랑해 왔다. 그런 통치 아래에서 성직자들은 자연히 군주, 궁정, 그 나라의 귀족과 젠트리에게 자기를 권하려 애쓴다. 그들은 주로 그들의 영향력으로 승진을 얻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후원자들에게 환심을 산다. 때로는 물론 가장 비열한 아첨과 맞장구로써이지만, 흔히 신분과 재산이 있는 사람들의 존경을 가장 받을 만하고 따라서 가장 얻을 가능성이 큰 모든 기술을 갈고닦음으로써이기도 하다. 곧 유용하고 장식적인 학문의 모든 부문에 대한 지식, 점잖은 너그러움을 지닌 몸가짐, 대화의 사교적 유쾌함, 그리고 광신자들이 가르치고 실천하는 체하는 불합리하고 위선적인 금욕에 대한 공공연한 경멸로써다. 광신자들은 그런 금욕으로 자기들에게는 일반 서민의 숭배를, 그런 금욕을 실천하지 않는다고 공언하는 신분과 재산이 있는 사람들 대부분에게는 일반 서민의 혐오를 끌어오려 한다. 그러나 그런 성직자들은 이런 식으로 상류 계층에 환심을 사는 동안, 하층 계층에 대한 자기 영향력과 권위를 유지하는 수단을 완전히 소홀히 하기 매우 쉽다. 그들은 윗사람들에게는 경청되고 존경받고 존중받는다. 그러나 아랫사람들 앞에서는 흔히 자기를 공격하기로 한 가장 무지한 열광자에 맞서 자기의 착실하고 온건한 교리를 효과적으로, 그리고 그런 청중을 납득시킬 만큼 옹호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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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츠빙글리(Zuinglius)의 추종자들, 더 정확히 말하면 칼뱅(Calvin)의 추종자들은 교회가 비게 될 때마다 각 교구의 주민에게 자기 목사를 선출할 권리를 주었고, 동시에 성직자 사이에 가장 완전한 평등을 확립했다. 이 제도의 앞부분은 그것이 활력을 유지하는 동안 무질서와 혼란 외에는 아무것도 낳지 않은 것 같으며, 성직자와 주민 모두의 도덕을 똑같이 타락시키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뒷부분은 완전히 바람직한 효과 외에는 아무런 효과도 낸 적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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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교구의 주민이 자기 목사를 선출할 권리를 유지하는 동안, 그들은 거의 언제나 성직자, 그것도 대개 그 계층 가운데 가장 당파적이고 광신적인 사람들의 영향 아래 행동했다. 성직자들은 그 민중 선거에서 자기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 가운데 많은 이가 스스로 광신자가 되거나 광신자인 체했고, 주민 사이에 광신을 부추겼으며, 거의 언제나 가장 광신적인 후보를 우대했다. 교구 사제의 임명 같은 사소한 일이 거의 언제나 격렬한 다툼을 일으켰다. 한 교구에서뿐 아니라, 그 분쟁에 끼어들지 않는 일이 거의 없는 이웃 모든 교구에서였다. 그 교구가 마침 대도시에 있으면, 그것은 모든 주민을 두 당파로 갈랐다. 그리고 그 도시가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여러 큰 도시처럼 마침 스스로 작은 공화국을 이루거나 작은 공화국의 수도라면, 이런 종류의 하찮은 분쟁은 모두 다른 모든 파벌의 적대감을 악화시킬 뿐 아니라, 교회에는 새로운 분열을, 국가에는 새로운 파벌을 남길 위험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작은 공화국들에서 집정관은 곧 공공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빈 성직록에 대한 추천권을 스스로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장로교식 교회 통치가 확립된 나라 가운데 가장 넓은 스코틀랜드에서는, 윌리엄 3세 치세 초에 장로제를 확립한 법으로 성직 추천권이 사실상 폐지되었다. 그 법은 적어도 각 교구의 특정 계층 사람들에게 매우 싼 값으로 자기 목사를 선출할 권리를 살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이 법이 확립한 구조는 약 22년 동안 존속하도록 허용되었지만, 이 더 민중적인 선출 방식이 거의 어디서나 일으킨 혼란과 무질서 때문에 앤 여왕 10년 법 제12장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처럼 넓은 나라에서는 먼 교구의 소요가 작은 나라에서만큼 정부를 어지럽힐 가능성이 크지 않았다. 앤 여왕 10년 법은 성직 추천권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에서 법은 예외 없이 추천권자가 추천한 사람에게 성직록을 주지만, 교회는 때로(이 점에서 교회의 결정이 그다지 일관되지는 않았으므로) 피추천자에게 이른바 영혼의 돌봄, 곧 교구의 교회 재판권을 주기 전에 주민의 일정한 동의를 요구한다. 교회는 적어도 때로는 교구의 평화를 걱정하는 체하며 이 동의를 얻을 때까지 취임을 미룬다. 이웃 성직자 일부가 때로는 이 동의를 얻어 내기 위해, 그러나 더 흔히는 막기 위해 은밀히 공작하는 것, 그리고 그런 경우 더 효과적으로 공작할 수 있도록 그들이 갈고닦는 대중 선동의 기술이, 아마 스코틀랜드의 성직자나 주민 사이에 옛 광신 정신이 무엇이든 남아 있게 하는 주된 원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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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식 교회 통치가 성직자 사이에 확립하는 평등은 첫째로 권위, 곧 교회 재판권의 평등, 둘째로 성직록의 평등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장로교회에서 권위의 평등은 완전하지만 성직록의 평등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한 성직록과 다른 성직록 사이의 차이가, 작은 성직록의 보유자조차 더 나은 것을 얻기 위해 아첨과 맞장구라는 비열한 기술로 추천권자에게 환심을 사도록 유혹할 만큼 큰 경우는 드물다. 성직 추천권이 완전히 확립된 모든 장로교회에서, 국교회 성직자들이 대체로 윗사람의 호의를 얻으려 애쓰는 것은 더 고귀하고 더 나은 기술로써, 곧 학식으로, 나무랄 데 없이 규칙적인 생활로, 그리고 충실하고 부지런한 직무 수행으로써다. 그들의 추천권자들은 흔히 그들 정신의 독립성에 대해 불평하기까지 한다. 추천권자들은 그것을 지난 호의에 대한 배은망덕으로 해석하기 쉽지만, 그것은 최악의 경우라도 아마 그런 종류의 호의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의식에서 자연히 생기는 무관심 이상의 것인 경우는 드물 것이다. 네덜란드, 제네바, 스위스,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성직자 대부분보다 더 학식 있고, 점잖고, 독립적이며, 존경할 만한 사람들의 집단은 아마 유럽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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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성직록이 모두 거의 같은 곳에서는 그 어느 것도 매우 클 수 없다. 그리고 이 성직록의 적당함은 물론 지나칠 수도 있지만 몇 가지 매우 바람직한 효과를 낸다. 작은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 위엄을 줄 수 있는 것은 모범적인 도덕뿐이다. 경박과 허영의 악덕은 필연적으로 그를 우스꽝스럽게 만들며, 게다가 일반 서민에게 그러한 것만큼이나 그에게도 거의 파멸적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행동에서 일반 서민이 가장 존경하는 도덕 체계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기 이익과 처지가 그를 이끌 생활 방식으로써 그들의 존경과 애정을 얻는다. 일반 서민은 우리 자신의 처지에 다소 가깝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 더 높은 처지에 있어야 할 사람을 자연히 바라보는 그 친절로 그를 바라본다. 그들의 친절은 자연히 그의 친절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그들을 가르치는 데 신중해지고, 그들을 돕고 구제하는 데 주의를 기울인다. 그는 자기에게 그토록 호의적인 사람들의 편견조차 경멸하지 않으며, 부유하고 기본재산이 넉넉한 교회의 거만한 고위 성직자들에게서 그토록 자주 보는 경멸적이고 오만한 태도로 그들을 대하는 일이 결코 없다. 그래서 장로교 성직자들은 아마 다른 어느 국교회의 성직자보다 일반 서민의 마음에 더 큰 영향력을 가진다. 그래서 일반 서민이 박해 없이 완전히, 거의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국교회로 개종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장로교 나라들에서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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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성직록의 대부분이 매우 적당한 나라에서는 대학 교수직이 대개 교회 성직록보다 나은 자리다. 이 경우 대학은 그 나라의 모든 성직자 가운데서 구성원을 골라 뽑을 수 있다. 성직자는 어느 나라에서나 단연 가장 많은 문필가 계층을 이룬다. 반대로 교회 성직록 가운데 매우 큰 것이 많은 곳에서는, 교회가 자연히 대학에서 그 저명한 문필가의 대부분을 끌어간다. 그들은 대개 그들에게 교회 승진을 마련해 줌으로써 자기 자신의 명예를 높이는 후원자를 찾는다. 앞의 처지에서는 대학이 그 나라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저명한 문필가들로 채워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뒤의 처지에서는 대학에 저명한 사람이 거의 없을 가능성이 크며, 그 몇몇은 그 단체의 가장 젊은 구성원 가운데 있을 것이고, 그들도 그 단체에 크게 쓸모 있을 만큼 경험과 지식을 쌓기 전에 빠져나갈 가능성이 크다. 볼테르(Mr. de Voltaire)는 문단에서 그다지 저명하지 않은 예수회원 포레(Porée) 신부가 프랑스에 있었던 교수 가운데 그 저작을 읽을 가치가 있는 유일한 교수였다고 지적한다. 그토록 많은 저명한 문필가를 낳은 나라에서 그 가운데 대학 교수였던 사람이 거의 하나도 없다는 것은 다소 기이하게 보일 것이다. 저 유명한 가상디(Cassendi)는 생애 초기에 엑스(Aix) 대학의 교수였다. 그의 천재성이 처음 드러나자, 그는 교회에 들어가면 훨씬 조용하고 안락한 생계와 함께 연구를 계속하기에 더 좋은 처지를 쉽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고, 즉시 그 권고를 따랐다. 볼테르의 지적은 프랑스뿐 아니라 다른 모든 로마 가톨릭 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어느 나라에서도 대학 교수인 저명한 문필가는, 아마 교회가 그들을 끌어갈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은 직업인 법학과 의학 분야를 제외하면 매우 드물게 볼 수 있다. 로마 교회 다음으로 잉글랜드 국교회가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단연 가장 부유하고 기본재산이 넉넉한 교회다. 그래서 잉글랜드에서는 교회가 끊임없이 대학에서 가장 뛰어나고 유능한 구성원을 모두 빼내 가고 있으며, 저명한 문필가로서 유럽에 알려지고 이름난 늙은 칼리지 튜터를 그곳에서 찾아보기란 어느 로마 가톨릭 나라에서만큼 드물다. 반대로 제네바,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칸톤,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나라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스웨덴, 덴마크에서는 그 나라들이 낳은 가장 저명한 문필가들이, 물론 모두는 아니지만 단연 대부분 대학 교수였다. 그 나라들에서는 대학이 끊임없이 교회에서 가장 저명한 문필가를 모두 빼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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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소수의 웅변가와 소수의 역사가를 제외하면, 그리스와 로마의 다른 저명한 문필가 가운데 단연 대부분이 공공 교사나 사설 교사, 대개 철학이나 수사학의 교사였던 것 같다는 점은 아마 주목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 지적은 리시아스(Lysias)와 이소크라테스(Isocrates),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부터 플루타르코스(Plutarch)와 에픽테토스(Epictetus), 수에토니우스(Suetonius)와 퀸틸리아누스(Quintilian)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학문의 어느 특정 부문을 해마다 가르칠 필요를 지우는 것은 실제로 그 자신을 그 학문의 완전한 대가로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 같다. 해마다 같은 영역을 다시 다루어야 하므로, 그가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사람이라면 몇 년 안에 필연적으로 그 모든 부분에 정통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특정한 점에 대해 한 해에 너무 성급한 의견을 형성하더라도, 이듬해 강의 과정에서 같은 주제를 다시 고찰하게 되면 그것을 바로잡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학문의 교사가 되는 것이 확실히 순전한 문필가의 자연스러운 일이듯, 그것은 또한 아마 그를 견실한 학식과 지식을 지닌 사람으로 만들 가능성이 가장 큰 교육일 것이다. 교회 성직록의 적당함은 그것이 행해지는 나라의 문필가 대부분을 그들이 공공에 가장 유용할 수 있는 일로 자연히 끌어들이고, 동시에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아마 가장 좋은 교육을 그들에게 주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학식을 될 수 있는 한 견실하고 될 수 있는 한 유용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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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국교회의 수입은 특정 토지나 장원에서 생길 수 있는 부분을 제외하면 국가 일반 수입의 한 부문이며, 그것이 이렇게 국가 방위와는 매우 다른 목적으로 전용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십일조는 실질적인 지조이며, 토지 소유자들이 그렇지 않았다면 할 수 있었을 만큼 국가 방위에 크게 기여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 따르면 토지의 지대가 모든 대군주국에서 국가의 위급한 필요를 궁극적으로 충당해야 하는 유일한 기금이고, 다른 사람들에 따르면 주된 기금이다. 이 기금 가운데 교회에 주어지는 것이 많을수록 국가에 돌릴 수 있는 것이 적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고 가정하면, 교회가 부유할수록 한편으로는 군주가,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이 필연적으로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으며, 모든 경우에 국가가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한 격률로 세울 수 있다. 여러 프로테스탄트 나라, 특히 스위스의 모든 프로테스탄트 칸톤에서는 예전에 로마 가톨릭교회에 속했던 수입, 곧 십일조와 교회 토지가 국교회 성직자에게 적당한 봉급을 줄 뿐 아니라, 거의 또는 전혀 추가하지 않고도 국가의 다른 모든 경비를 충당하기에 충분한 기금임이 밝혀졌다. 특히 강력한 베른 칸톤의 집정관들은 이 기금의 절약분으로 수백만에 이른다고 여겨지는 매우 큰 금액을 모았다. 그 일부는 공공 금고에 예치되어 있고, 일부는 유럽의 여러 채무국의 이른바 공채, 주로 프랑스와 그레이트브리튼의 공채에 이자를 받고 투자되어 있다. 베른이나 다른 어느 프로테스탄트 칸톤의 교회가 국가에 얼마나 많은 비용을 들게 하는지 그 전체 액수는 나도 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매우 정확한 계정에 따르면, 1755년 스코틀랜드 국교회 성직자의 전체 수입은 그들의 교회 토지(glebe)와 목사관 곧 주택의 임대료를 합리적인 평가에 따라 추정한 것까지 포함하여 6만 8,514파운드 1실링 5와 12분의 1펜스에 지나지 않았다. 이 매우 적당한 수입이 944명의 목사에게 점잖은 생계를 준다. 교회와 목사관의 건축과 수리에 이따금 지출되는 것까지 포함한 교회의 전체 비용은 연 8만이나 8만 5천 파운드를 넘는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교회도 이 매우 빈약하게 기본재산을 갖춘 스코틀랜드 교회보다 국민 대다수 사이에서 신앙의 통일, 경건의 열기, 질서와 규칙성과 엄격한 도덕의 정신을 더 잘 유지하지는 못한다. 국교회가 낼 수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시민적·종교적 좋은 효과를 이 교회는 다른 어느 교회만큼 완전하게 낸다. 대체로 스코틀랜드 교회보다 기본재산이 더 넉넉하지 않은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대부분은 그 효과를 더 높은 정도로 낸다. 프로테스탄트 칸톤의 대부분에서는 자기가 국교회 신자라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물론 그가 다른 교회 신자라고 고백하면 법은 그에게 칸톤을 떠나도록 강제한다. 그러나 그토록 가혹한, 아니 실로 그토록 억압적인 법은, 성직자의 근면이 미리 아마 몇몇 개인을 제외한 국민 전체를 국교회로 개종시키지 않았다면 그런 자유로운 나라들에서 결코 시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 지역과 로마 가톨릭 지역이 우연히 합쳐져 개종이 그렇게 완전하지 않았던 스위스의 일부 지역에서는 두 종교가 용인될 뿐 아니라 법으로 확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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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그 보수가 직무의 성질에 될 수 있는 한 정확히 비례해야 하는 것 같다. 어떤 직무가 보수를 크게 적게 받으면, 그것은 거기에 고용된 사람 대부분의 비천함과 무능 때문에 해를 입기 매우 쉽다. 보수를 크게 많이 받으면, 아마 그들의 태만과 게으름 때문에 그보다 더 해를 입기 쉽다. 큰 수입을 가진 사람은 그 직업이 무엇이든 다른 큰 수입을 가진 사람들처럼 살아야 하고, 자기 시간의 큰 부분을 잔치와 허영과 방탕에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직자의 경우 이런 생활 방식은 그의 직분의 의무에 써야 할 시간을 소비할 뿐 아니라, 일반 서민의 눈에 그가 그 의무를 적절한 무게와 권위로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것인 성품의 거룩함을 거의 완전히 파괴한다.

Q1확인

공공사업과 공공 기관은 사회에 유리한데도 왜 개인이 세우지 않는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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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2적용

내가 매일 쓰는 공공 시설 하나를 골라, 그것이 없다면 하루가 어떻게 달라질지 적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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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애덤 스미스, 『국부론』 제3절. Project Gutenberg 영어 전자본을 저본으로 옮김. 원문: Project Gutenberg eBook #3300.

독자들의 생각 3 · 예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