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6제1절 방위비에 대하여

2026 가을, 국부론 제1절지은이 애덤 스미스약 13분
제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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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첫째 의무, 곧 사회를 다른 독립된 사회들의 폭력과 침략으로부터 보호하는 의무는 군사력으로써만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평시에 이 군사력을 준비하는 비용과 전시에 그것을 사용하는 비용은 사회의 상태에 따라, 개량의 시기에 따라 매우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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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 토착 부족들에서 보듯이 가장 낮고 미개한 사회 상태인 수렵 민족에서는 모든 사람이 사냥꾼이면서 전사다. 그가 자기 사회를 방어하거나 다른 사회가 자기 사회에 가한 피해에 복수하기 위해 전쟁에 나갈 때, 그는 집에서 살 때와 같은 방식으로 자기 노동으로 스스로를 부양한다. 그의 사회는(이런 상태에서는 엄밀히 말해 군주도 국가도 없으므로) 그를 싸움터에 내보낼 준비를 하는 데에도, 그가 싸움터에 있는 동안 그를 부양하는 데에도 아무런 비용을 들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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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인과 아랍인에서 보듯이 더 발전한 사회 상태인 목축 민족에서도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전사다. 그런 민족은 대개 고정된 거처가 없고, 천막이나 이곳저곳으로 쉽게 옮길 수 있는 일종의 지붕 덮인 수레에서 산다. 부족 전체, 곧 민족 전체가 계절에 따라, 또 다른 사정에 따라 거처를 바꾼다. 가축 떼가 나라의 한 지역의 꼴을 다 먹어 치우면 다른 지역으로, 그다음에는 셋째 지역으로 옮겨 간다. 건기에는 강가로 내려오고, 우기에는 고지대로 물러난다. 그런 민족이 전쟁에 나갈 때, 전사들은 자기 가축 떼를 노인과 여자와 아이들의 허약한 방어에 맡기려 하지 않을 것이고, 노인과 여자와 아이들은 방어도 생활 자료도 없이 뒤에 남겨지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민족 전체가 평시에도 떠도는 생활에 익숙해 있으므로 전시에도 쉽게 싸움터에 나선다. 그들이 군대로서 행군하든, 목동 무리로서 이동하든, 그 목적은 매우 다르지만 생활 방식은 거의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함께 전쟁에 나가며, 저마다 할 수 있는 만큼 싸운다. 타타르인 사이에서는 여자들조차 전투에 참여한 일이 흔히 알려져 있다. 그들이 이기면, 적대 부족에 속한 것은 무엇이든 승리의 보상이 된다. 그러나 지면 모든 것을 잃는다. 가축 떼뿐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까지 정복자의 전리품이 된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대부분도 당장의 생활 자료를 얻기 위해 정복자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 나머지는 대개 사막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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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인이나 아랍인의 일상생활, 일상적인 운동은 그에게 전쟁을 충분히 준비시킨다. 달리기, 씨름, 몽둥이 싸움, 투창, 활쏘기 등은 야외에서 사는 사람들의 흔한 오락이며, 모두 전쟁의 모상(模像)이다. 타타르인이나 아랍인이 실제로 전쟁에 나갈 때, 그는 평시와 같은 방식으로 함께 데려가는 자기 가축 떼로 부양된다. 그의 족장이나 군주는(그런 민족에게는 모두 족장이나 군주가 있다) 그를 싸움터에 내보낼 준비를 하는 데 아무런 비용을 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싸움터에 있을 때, 약탈의 기회가 그가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유일한 보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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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민의 군대는 2, 3백 명을 넘는 일이 드물다. 사냥이 주는 불안정한 생활 자료로는 그보다 많은 사람이 상당한 기간 함께 지내기가 어렵다. 반대로 목축민의 군대는 때로 20만이나 30만에 이를 수 있다. 무엇도 그들의 전진을 가로막지 않는 한, 꼴을 다 먹어 치운 한 지역에서 아직 손대지 않은 다른 지역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한, 함께 행군할 수 있는 사람의 수에는 한계가 거의 없는 것 같다. 수렵 민족은 결코 이웃의 문명 국민에게 무서운 존재가 될 수 없지만, 목축 민족은 그럴 수 있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인디언 전쟁만큼 하찮은 것은 없다. 반대로 아시아에서 타타르인의 침입이 흔히 그러했던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유럽도 아시아도 단결한 스키타이인에게는 저항할 수 없으리라는 투키디데스(Thucydides)의 판단은 모든 시대의 경험으로 입증되었다. 스키티아 또는 타타르의 광대하지만 방어할 데 없는 평원의 주민들은 흔히 어떤 정복자 무리나 씨족의 족장 지배 아래 단결했으며, 그들의 단결은 언제나 아시아의 파괴와 황폐로 두드러졌다. 또 하나의 큰 목축 민족인 아라비아의 황량한 사막 주민들은 단 한 번, 마호메트와 그의 직계 후계자들 아래에서만 단결했다. 정복보다는 종교적 열광의 결과였던 그들의 단결도 같은 방식으로 두드러졌다. 만일 아메리카의 수렵 민족이 언젠가 목축민이 된다면, 그들의 이웃은 유럽 식민지에 지금보다 훨씬 위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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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더 발전한 사회 상태, 곧 대외 상업이 거의 없고 거의 모든 개별 가정이 자기 용도로 마련하는 조잡한 가내 제조품 외에는 다른 제조업이 없는 농경 민족에서도,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전사이거나 쉽게 전사가 된다. 농업으로 사는 사람들은 대개 하루 종일 야외에서 지내며 계절의 온갖 혹독함에 노출된다. 그들의 일상생활의 강인함은 그들에게 전쟁의 노고를 견딜 준비를 시키며, 그들의 필수적인 일 가운데 일부는 전쟁의 노고와 매우 닮았다. 도랑 파는 사람의 필수적인 일은 그로 하여금 밭에 울타리를 치는 것처럼 참호에서 일하고 진지를 요새화할 준비를 시킨다. 그런 농경민의 일상적인 오락은 목축민의 오락과 같으며, 마찬가지로 전쟁의 모상이다. 그러나 농경민은 목축민보다 여가가 적으므로 그런 오락을 그렇게 자주 하지는 못한다. 그들은 군인이지만 자기 훈련에 그다지 숙달된 군인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이라도 그들을 싸움터에 내보낼 준비를 하는 데 군주나 국가에 비용이 드는 일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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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은 가장 미개하고 낮은 상태에서도 정착, 곧 큰 손실 없이는 버릴 수 없는 일종의 고정된 거처를 전제한다. 그러므로 순전한 농경 민족이 전쟁에 나갈 때는 국민 전체가 함께 싸움터에 나설 수 없다. 적어도 노인과 여자와 아이들은 거처를 돌보기 위해 집에 남아야 한다. 그러나 군역 연령의 남자들은 모두 싸움터에 나설 수 있으며, 이런 종류의 작은 민족에서는 흔히 그렇게 했다. 모든 국민에서 군역 연령의 남자는 국민 전체의 약 4분의 1이나 5분의 1에 이른다고 여겨진다. 또 원정이 파종 후에 시작되어 수확 전에 끝난다면, 농부와 그의 주요 일꾼들은 큰 손실 없이 농장을 비울 수 있다. 그는 그동안 해야 할 일을 노인과 여자와 아이들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는 짧은 원정 동안 보수 없이 복무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를 싸움터에서 부양하는 데 드는 군주나 국가의 비용도 흔히 그를 싸움터에 내보낼 준비를 하는 데 드는 비용만큼 적다. 고대 그리스 여러 국가의 시민들은 제2차 페르시아 전쟁 이후까지, 펠로폰네소스 사람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까지 이런 방식으로 복무했던 것 같다. 투키디데스가 지적하듯이, 펠로폰네소스 사람들은 대개 여름에 싸움터를 떠나 수확을 거두러 집으로 돌아갔다. 로마 국민도 왕정 아래에서, 그리고 공화정 초기 동안 같은 방식으로 복무했다. 베이(Veii) 포위전 때에 이르러서야 집에 남은 사람들이 전쟁에 나간 사람들을 부양하는 데 얼마간 기여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의 폐허 위에 세워진 유럽의 군주국들에서는, 엄밀히 봉건법이라 부르는 것이 확립되기 전에도, 그리고 확립된 뒤 얼마 동안에도, 대영주들이 그 모든 직속 가신과 함께 자기 비용으로 왕을 섬기곤 했다. 그들은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싸움터에서도 그 특정한 경우에 왕에게서 받는 봉급이나 보수가 아니라 자기 수입으로 스스로를 부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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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발전한 사회 상태에서는 두 가지 다른 원인이 싸움터에 나서는 사람들이 자기 비용으로 스스로를 부양하는 것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그 두 원인은 제조업의 진보와 전쟁 기술의 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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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가 원정에 동원되더라도, 그 원정이 파종 후에 시작되어 수확 전에 끝나기만 하면, 그의 일의 중단이 언제나 그의 수입을 상당히 줄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노동이 개입하지 않아도 자연이 남은 일의 대부분을 스스로 한다. 그러나 장인, 예컨대 대장장이나 목수나 직공이 작업장을 떠나는 순간 그의 수입의 유일한 원천은 완전히 말라 버린다. 자연은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그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한다. 그러므로 그가 공공을 방어하기 위해 싸움터에 나설 때, 그는 자기를 부양할 수입이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공공이 부양해야 한다. 그런데 주민의 큰 부분이 장인과 제조업자인 나라에서는, 전쟁에 나가는 사람들의 큰 부분이 그 계층에서 뽑혀야 하며, 따라서 그들이 공공의 일에 종사하는 동안 공공이 그들을 부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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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전쟁 기술이 점차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학문으로 자라나고, 전쟁의 승패가 사회 초기처럼 단 한 번의 불규칙한 접전이나 전투로 결정되지 않고, 다툼이 대개 여러 차례의 원정에 걸쳐 길게 이어지며 그 각각이 한 해의 대부분 동안 계속되면, 공공은 전쟁에서 공공을 위해 복무하는 사람들을 적어도 그 복무에 종사하는 동안 부양해야 할 필요가 보편적으로 생긴다. 전쟁에 나가는 사람들의 평시 통상 직업이 무엇이든,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지루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복무는 그들에게 단연 너무 무거운 부담이 될 것이다. 그래서 제2차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의 군대는 대개 용병 부대로 구성되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일부는 시민이었지만 일부는 외국인이었으며, 모두 똑같이 국가의 비용으로 고용되고 보수를 받았다. 베이 포위전 때부터 로마의 군대는 싸움터에 머무는 동안 복무에 대한 보수를 받았다. 봉건 정부 아래에서는 대영주와 그 직속 가신의 군역이 일정한 시기가 지난 뒤 보편적으로 화폐 납부로 바뀌었으며, 그 화폐는 그들 대신 복무하는 사람들을 부양하는 데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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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전체의 수에 비례하여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미개한 사회 상태보다 문명화된 사회 상태에서 필연적으로 훨씬 적다. 문명사회에서는 군인이 전적으로 군인이 아닌 사람들의 노동으로 부양되므로, 전자의 수는 후자가 각자의 신분에 걸맞은 방식으로 자기 자신과 자기가 부양해야 하는 정부와 법률의 다른 관리들을 부양하고도 그 위에 부양할 수 있는 수를 결코 넘을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작은 농업 국가들에서는 국민 전체의 4분의 1이나 5분의 1이 스스로를 군인으로 여겼으며, 때로는 싸움터에 나섰다고 한다. 근대 유럽의 문명 국민 사이에서는 어느 나라든 그 복무 비용을 치르는 나라를 파멸시키지 않고 군인으로 고용할 수 있는 주민은 100분의 1을 넘지 않는다고 흔히 계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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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싸움터에 내보낼 준비를 하는 비용은, 그것을 싸움터에서 부양하는 비용이 전적으로 군주나 국가에 넘어간 뒤 오랫동안 어느 국민에게서도 상당한 액수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고대 그리스의 모든 공화국에서 군사 훈련을 배우는 것은 국가가 모든 자유 시민에게 부과한 교육의 필수 부분이었다. 모든 도시에는 공공 연병장이 있었던 것 같으며, 그곳에서 공공 관리의 보호 아래 젊은이들이 여러 교사에게서 여러 가지 훈련을 배웠다. 이 매우 단순한 제도에, 그리스의 어느 국가든 시민을 전쟁에 대비시키는 데 들인 비용 전체가 있었던 것 같다. 고대 로마에서는 마르스 연병장(Campus Martius)의 훈련이 고대 그리스의 김나지움(Gymnasium)의 훈련과 같은 목적에 이바지했다. 봉건 정부 아래에서는 모든 지역의 시민이 궁술과 다른 여러 군사 훈련을 연습해야 한다는 많은 공공 법령이 같은 목적을 증진하려는 것이었지만, 그다지 잘 증진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 법령의 집행을 맡은 관리들의 관심 부족 때문이든 다른 어떤 원인 때문이든, 그 법령들은 보편적으로 무시된 것 같으며, 그 모든 정부가 발전해 감에 따라 군사 훈련은 국민 대다수 사이에서 점차 쓰이지 않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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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공화국들에서는 그 존속 기간 전체에 걸쳐, 그리고 봉건 정부 아래에서는 그것이 처음 확립된 뒤 상당한 기간 동안, 군인이라는 직업은 특정 계층 시민의 유일한 또는 주된 직업을 이루는 별개의 독립된 직업이 아니었다. 국가의 모든 신민은 생계를 얻는 통상의 직업이나 일이 무엇이든, 모든 통상적인 경우에 자기도 군인이라는 직업을 수행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겼고, 많은 비상한 경우에는 그것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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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쟁 기술은 확실히 모든 기술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이듯, 개량이 진보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그 가운데 가장 복잡한 것의 하나가 된다. 그것과 필연적으로 연관된 기계 기술과 다른 몇몇 기술의 상태가, 어느 특정 시기에 그것이 도달할 수 있는 완성의 정도를 결정한다. 그러나 그것을 이 완성의 정도까지 끌어올리려면 그것이 특정 계층 시민의 유일한 또는 주된 직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분업은 다른 모든 기술의 개량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기술의 개량에도 필요하다. 다른 기술에는 개인들의 분별에 의해 분업이 자연히 도입된다. 그들은 많은 직업을 겸하는 것보다 특정한 직업에 전념함으로써 자기 사적 이익을 더 잘 증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인이라는 직업을 다른 모든 직업과 구별되는 별개의 특정 직업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국가의 지혜뿐이다. 깊은 평화의 시기에 공공으로부터 아무런 특별한 장려도 받지 않으면서 자기 시간의 대부분을 군사 훈련에 쓰는 개인 시민은 물론 그 훈련에서 자기를 크게 향상시키고 즐거움도 크게 누릴 수 있겠지만, 확실히 자기 이익을 증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가 자기 시간의 대부분을 이 특수한 일에 바치는 것을 그의 이익이 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국가의 지혜뿐이다. 그런데 국가들은 그 처지가 자기 존속을 위해 그런 지혜를 가져야 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언제나 그 지혜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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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축민은 여가가 매우 많다. 미개한 농업 상태의 농경민은 얼마간의 여가가 있다. 장인이나 제조업자는 여가가 전혀 없다. 첫째는 아무런 손실 없이 자기 시간의 많은 부분을 무예 훈련에 쓸 수 있고, 둘째는 그 일부를 쓸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은 단 한 시간도 손실 없이 그것에 쓸 수 없으며, 자기 이익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그로 하여금 그것을 완전히 소홀히 하게 한다. 또한 기술과 제조업의 진보가 필연적으로 도입하는 농업의 개량은 농경민에게도 장인만큼이나 여가를 거의 남겨 주지 않는다. 군사 훈련은 도시 주민뿐 아니라 농촌 주민에게도 소홀히 되기에 이르고, 국민 대다수는 완전히 비전투적이 된다. 동시에 농업과 제조업의 개량에 언제나 뒤따르며 실은 그 개량의 축적된 생산물에 지나지 않는 부는 모든 이웃의 침략을 불러일으킨다. 근면하고 그 때문에 부유한 국민은 모든 국민 가운데 공격받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리고 국가가 공공 방위를 위해 어떤 새로운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국민의 자연스러운 습관은 그들이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을 완전히 잃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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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공공 방위를 위해 그럭저럭 괜찮은 대비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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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국가는 매우 엄격한 단속으로 국민의 이해관계와 기질과 성향의 모든 경향을 거슬러 군사 훈련의 실시를 강제하고, 군역 연령의 모든 시민이나 그 가운데 일정 수에게 그들이 마침 영위하는 다른 어떤 직업이나 직무에 군인이라는 직업을 어느 정도 겸하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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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둘째로, 국가는 일정 수의 시민을 부양하고 고용하여 끊임없이 군사 훈련을 하게 함으로써, 군인이라는 직업을 다른 모든 직업과 구별되는 별개의 특정 직업으로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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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이 두 방책 가운데 첫째에 의존하면, 그 군사력은 민병(militia)으로 이루어진다고 하고, 둘째에 의존하면 상비군(standing army)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군사 훈련의 실시는 상비군 병사들의 유일한 또는 주된 일이며, 국가가 그들에게 주는 부양비나 급료가 그들의 생활 자료의 주된 통상 기금이다. 군사 훈련의 실시는 민병의 병사들에게는 이따금 하는 일일 뿐이며, 그들은 생활 자료의 주된 통상 기금을 다른 어떤 직업에서 얻는다. 민병에서는 노동자, 장인, 상인의 성격이 군인의 성격을 압도한다. 상비군에서는 군인의 성격이 다른 모든 성격을 압도한다. 그리고 이 구별에 그 두 종류의 군사력 사이의 본질적 차이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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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에는 몇 가지 다른 종류가 있었다. 어떤 나라에서는 국가 방위를 위해 정해진 시민들이 훈련만 받았을 뿐,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편제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곧 각자 고유한 상설 장교 아래 훈련을 하는 별개의 독립된 부대들로 나뉘지 않았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공화국들에서는 각 시민이 집에 머무는 동안 혼자 독자적으로, 또는 가장 마음에 드는 동료들과 함께 훈련을 했던 것 같으며, 실제로 싸움터에 나서라는 소집을 받을 때까지는 어떤 특정 부대에도 소속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른 나라에서는 민병이 훈련을 받았을 뿐 아니라 편제되기도 했다. 잉글랜드와 스위스, 그리고 내가 믿기로는 이런 종류의 불완전한 군사력이 확립된 근대 유럽의 다른 모든 나라에서, 모든 민병은 평시에도 특정 부대에 소속되며, 그 부대는 고유한 상설 장교 아래 훈련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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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병사 각자가 무기 사용에 가장 큰 숙련과 솜씨를 지닌 군대가 우세했다. 몸의 힘과 민첩함이 가장 중요했으며, 대개 전투의 운명을 결정했다. 그런데 무기 사용의 이런 숙련과 솜씨는, 오늘날 펜싱이 그렇듯, 큰 부대로서가 아니라 각자 따로 특정한 학교에서 특정한 교사 아래, 또는 자기와 대등한 특정 동료들과 함께 연습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었다. 화기가 발명된 이후로는 몸의 힘과 민첩함, 심지어 무기 사용의 비상한 솜씨와 숙련도, 결코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덜 중요해졌다. 무기의 성질이 서툰 사람을 숙련된 사람과 결코 대등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예전 어느 때보다 그에 가깝게 만든다. 그것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모든 솜씨와 숙련은 큰 부대로서 연습함으로써 충분히 얻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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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율, 질서, 명령에 대한 즉각적인 복종은 근대 군대에서 병사들의 무기 사용의 솜씨와 숙련보다 전투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더 중요한 자질이다. 그런데 화기의 소음과 연기, 그리고 포탄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마자, 흔히 전투가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기 훨씬 전부터 모든 사람이 매 순간 노출되어 있다고 느끼는 보이지 않는 죽음은, 근대 전투의 시작에서조차 이 규율과 질서와 즉각적인 복종을 상당한 정도로 유지하기를 매우 어렵게 만들 것이다. 고대 전투에서는 사람의 목소리에서 나는 것 외에는 소음이 없었고, 연기도 없었으며, 부상이나 죽음의 보이지 않는 원인도 없었다. 모든 사람은 어떤 치명적인 무기가 실제로 다가오기 전까지는 그런 무기가 가까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고 자기의 무기 사용 숙련과 솜씨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부대 사이에서는, 고대 전투의 시작에서뿐 아니라 그 전 과정에 걸쳐, 두 군대 가운데 하나가 확실히 패배할 때까지 어느 정도의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기가 훨씬 덜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규율, 질서, 명령에 대한 즉각적인 복종의 습관은 큰 부대로서 훈련받는 부대만이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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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민병은 어떤 방식으로 규율을 세우고 훈련을 하든 언제나 잘 규율되고 잘 훈련된 상비군보다 훨씬 열등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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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 번, 또는 한 달에 한 번만 훈련받는 병사들은 매일, 또는 하루걸러 훈련받는 병사들만큼 무기 사용에 숙달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사정이 근대에는 고대만큼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주로 훈련에서의 뛰어난 숙달 덕분이라고 하는 프로이센 군대의 공인된 우위는, 그것이 오늘날에도 매우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납득시켜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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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 번, 또는 한 달에 한 번만 장교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고, 그 밖의 모든 때에는 어떤 점에서도 장교에게 책임을 지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자기 일을 처리할 자유가 있는 병사들은, 그 생활과 행동 전체가 매일 장교의 지휘를 받고 매일 그의 명령에 따라 일어나고 잠자리에 드는, 또는 적어도 숙소로 물러나는 병사들과 같은 경외심을 장교 앞에서 품을 수 없으며, 같은 즉각적인 복종의 태도를 가질 수 없다. 이른바 규율, 곧 즉각적인 복종의 습관에서 민병은 이른바 집총 훈련, 곧 무기의 취급과 사용에서 때로 그럴 수 있는 것보다 언제나 더욱 상비군에 뒤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근대 전쟁에서는 즉각적이고 신속한 복종의 습관이 무기 취급에서의 상당한 우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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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인이나 아랍인의 민병처럼 평시에 복종하는 데 익숙한 바로 그 족장 아래에서 전쟁에 나가는 민병이 단연 가장 좋다. 장교에 대한 존경, 즉각적인 복종의 습관에서 그들은 상비군에 가장 가깝다. 하일랜드 민병도 자기 족장 아래에서 복무할 때는 같은 종류의 이점을 얼마간 가졌다. 그러나 하일랜드 사람들은 떠도는 목축민이 아니라 정착한 목축민이었고, 모두 고정된 거처가 있었으며, 평화로운 시기에 족장을 따라 이곳저곳 다니는 데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전시에도 족장을 따라 상당히 먼 곳까지 가거나 오랫동안 싸움터에 머물기를 덜 원했다. 그들은 전리품을 얻으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으며, 족장의 권위는 그들을 붙잡아 두기에 충분한 경우가 드물었다. 복종의 면에서 그들은 언제나 타타르인과 아랍인에 대해 전해지는 것보다 훨씬 못했다. 또한 하일랜드 사람들은 정착 생활 때문에 야외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었으므로, 타타르인과 아랍인에 대해 전해지는 것보다 언제나 군사 훈련에 덜 익숙했고 무기 사용에 덜 숙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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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떤 종류의 민병이든 여러 차례 연속된 원정에서 싸움터에 복무하면 모든 면에서 상비군이 된다는 점이다. 병사들은 매일 무기 사용 훈련을 받고, 늘 장교의 지휘 아래 있으므로 상비군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즉각적인 복종에 익숙해진다. 그들이 싸움터에 나서기 전에 무엇이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싸움터에서 몇 차례 원정을 보내고 나면 필연적으로 모든 면에서 상비군이 된다. 아메리카에서의 전쟁이 또 한 차례의 원정으로 길어진다면, 아메리카 민병은 모든 면에서, 적어도 지난 전쟁에서 그 용맹이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가장 강인한 고참병들에 뒤지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 그 상비군의 맞수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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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별을 잘 이해하고 나면, 모든 시대의 역사가 잘 정비된 상비군이 민병에 대해 갖는 저항할 수 없는 우위를 증언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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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믿을 만한 역사에서 뚜렷한 기록을 찾을 수 있는 최초의 상비군 가운데 하나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Philip of Macedon)의 상비군이다. 트라키아인, 일리리아인, 테살리아인, 그리고 마케도니아 인근의 몇몇 그리스 도시들과 그가 자주 벌인 전쟁은, 처음에는 아마 민병이었을 그의 군대를 점차 상비군의 엄정한 규율로 단련했다. 그는 평화로울 때—그런 일은 매우 드물었고 결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그 군대를 해산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 군대는 물론 길고 격렬한 싸움 끝이기는 했지만 고대 그리스 주요 공화국들의 용감하고 잘 훈련된 민병을 무찌르고 굴복시켰으며, 그 뒤에는 거의 싸움도 없이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나약하고 훈련이 부족한 민병을 무찔렀다. 그리스 공화국들과 페르시아 제국의 몰락은 상비군이 다른 모든 종류의 민병에 대해 갖는 저항할 수 없는 우위의 결과였다. 그것은 역사가 뚜렷하고 상세한 기록을 남긴, 인류사의 첫째 대변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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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의 몰락과 그에 따른 로마의 융성이 둘째 대변혁이다. 그 두 유명한 공화국의 운명의 모든 변천은 같은 원인으로 매우 잘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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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카르타고 전쟁이 끝난 때부터 제2차 카르타고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카르타고의 군대는 계속 싸움터에 있었으며, 차례로 지휘권을 이어받은 세 위대한 장군, 곧 하밀카르(Amilcar), 그의 사위 하스드루발(Asdrubal), 그의 아들 한니발(Annibal) 아래에서 쓰였다. 처음에는 반란을 일으킨 자기네 노예들을 응징하는 데, 그다음에는 반란을 일으킨 아프리카의 민족들을 굴복시키는 데, 마지막으로 에스파냐라는 큰 왕국을 정복하는 데 쓰였다. 한니발이 에스파냐에서 이탈리아로 이끌고 간 군대는 그 여러 전쟁에서 필연적으로 점차 상비군의 엄정한 규율로 단련되었을 것이다. 그동안 로마인은 완전히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지만, 이 기간에 그다지 중대한 전쟁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군사 규율은 상당히 해이해졌다고 흔히들 말한다. 한니발이 트레비아(Trebia), 트라시메누스(Thrasymenus), 칸나이(Cannae)에서 맞닥뜨린 로마 군대는 상비군에 맞선 민병이었다. 아마 이 사정이 다른 어떤 사정보다 그 전투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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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이 에스파냐에 남겨 두고 간 상비군도 로마인이 그것에 맞서 보낸 민병에 대해 같은 우위를 가졌으며, 몇 년 안에 그의 동생인 소(小) 하스드루발의 지휘 아래 그들을 그 나라에서 거의 완전히 몰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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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은 본국에서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로마 민병은 계속 싸움터에 있었으므로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잘 규율되고 잘 훈련된 상비군이 되었고, 한니발의 우위는 날마다 점점 줄어들었다. 하스드루발은 에스파냐에서 지휘하던 상비군의 전부, 또는 거의 전부를 이끌고 이탈리아에 있는 형을 도우러 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행군에서 그는 안내인들에게 속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모든 면에서 자기 군대와 대등하거나 그보다 우세한 다른 상비군에게 기습 공격을 받아 완전히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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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드루발이 에스파냐를 떠나자, 위대한 스키피오(Scipio)는 자기 군대보다 열등한 민병 외에는 아무런 적수도 만나지 않았다. 그는 그 민병을 무찌르고 굴복시켰으며,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그 자신의 민병은 필연적으로 잘 규율되고 잘 훈련된 상비군이 되었다. 그 상비군은 그 뒤 아프리카로 건너갔는데, 그곳에서 그것에 맞선 것은 민병뿐이었다. 카르타고를 방어하기 위해 한니발의 상비군을 불러들여야 했다. 낙담하고 여러 차례 패배한 아프리카 민병이 그 군대에 합류하여, 자마(Zama) 전투에서 한니발 군대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그날의 결과가 두 경쟁 공화국의 운명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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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카르타고 전쟁이 끝난 때부터 로마 공화정이 몰락할 때까지, 로마의 군대는 모든 면에서 상비군이었다. 마케도니아의 상비군은 그들의 군대에 얼마간 저항했다. 로마인은 그 위세의 절정기에 그 작은 왕국을 굴복시키는 데 두 차례의 큰 전쟁과 세 차례의 큰 전투를 치러야 했다. 그 마지막 왕의 비겁함이 없었다면 그 정복은 아마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고대 세계의 모든 문명 국민, 곧 그리스, 시리아, 이집트의 민병은 로마의 상비군에 미약하게 저항했을 뿐이다. 몇몇 미개 민족의 민병은 훨씬 잘 스스로를 방어했다.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가 흑해와 카스피해 북쪽 지역에서 끌어온 스키타이 또는 타타르 민병은 제2차 카르타고 전쟁 이후 로마인이 맞닥뜨려야 했던 가장 무서운 적이었다. 파르티아와 게르만의 민병도 언제나 만만치 않았으며, 여러 차례 로마 군대에 대해 매우 상당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체로, 그리고 로마 군대가 잘 지휘되었을 때는 로마 군대가 훨씬 우세했던 것 같다. 그리고 로마인이 파르티아나 게르마니아의 최종 정복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마 이미 너무 큰 제국에 그 두 미개한 나라를 더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파르티아인은 스키타이 또는 타타르 계통의 민족이었던 것 같으며, 언제나 조상의 풍습을 많이 간직했던 것 같다. 고대 게르만인은 스키타이인이나 타타르인처럼 떠도는 목축 민족이었으며, 평시에 따르는 데 익숙한 바로 그 족장 아래에서 전쟁에 나갔다. 그들의 민병은 스키타이인이나 타타르인의 민병과 정확히 같은 종류였으며, 그들은 아마 스키타이인이나 타타르인의 후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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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원인이 로마 군대의 규율을 해이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그 극도의 엄격함이 아마 그 원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들의 위세가 절정에 이르러 어떤 적도 그들에게 맞설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시절, 그들의 무거운 갑옷은 쓸데없이 거추장스럽다 하여 벗어 던져졌고, 고된 훈련은 쓸데없이 힘들다 하여 소홀히 되었다. 게다가 로마 황제들 아래에서 로마의 상비군, 특히 게르마니아와 판노니아의 국경을 지키는 상비군은 그 주인들에게 위험해졌다. 그들은 흔히 자기네 장군을 내세워 주인에게 맞서곤 했다. 그들을 덜 위협적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저자들에 따르면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sian)가, 다른 저자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가 처음으로 그들을 국경에서 철수시켰다. 그 전에 그들은 언제나 그곳에 대개 각각 2개나 3개 군단으로 이루어진 큰 부대로 주둔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작은 부대로 나누어 여러 지방 도시에 분산 배치했으며, 침략을 격퇴해야 할 때가 아니면 그곳에서 거의 이동시키지 않았다. 상업과 제조업 도시에 주둔하며 그 숙영지에서 좀처럼 옮겨지지 않은 작은 병사 부대들은 그 자신이 상인, 장인, 제조업자가 되었다. 시민의 성격이 군인의 성격을 압도하게 되었고, 로마의 상비군은 점차 타락하고 방치되고 규율 없는 민병으로 퇴화하여, 곧이어 서로마 제국을 침략한 게르만과 스키타이 민병의 공격에 저항할 수 없게 되었다. 황제들이 한동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민족들 가운데 일부의 민병을 고용하여 다른 민족들의 민병에 맞서게 함으로써였다. 서로마 제국의 몰락은 고대 역사가 뚜렷하거나 상세한 기록을 남긴, 인류사의 셋째 대변혁이다. 그것은 미개 민족의 민병이 문명 국민의 민병에 대해 갖는, 곧 목축 민족의 민병이 농경민, 장인, 제조업자의 국민의 민병에 대해 갖는 저항할 수 없는 우위 때문에 일어났다. 민병이 거둔 승리는 대개 상비군에 대한 것이 아니라 훈련과 규율에서 자기보다 열등한 다른 민병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스 민병이 페르시아 제국의 민병에 대해 거둔 승리가 그러했고, 후대에 스위스 민병이 오스트리아인과 부르고뉴인의 민병에 대해 거둔 승리도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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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 제국의 폐허 위에 자리 잡은 게르만과 스키타이 민족들의 군사력은 그들의 새 정착지에서도 한동안 원래 나라에서와 같은 종류였다. 그것은 목축민과 농경민의 민병이었으며, 전시에는 평시에 복종하는 데 익숙한 바로 그 족장들의 지휘 아래 싸움터에 나섰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럭저럭 잘 훈련되고 그럭저럭 잘 규율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술과 산업이 진보함에 따라 족장들의 권위는 점차 쇠퇴했고, 국민 대다수는 군사 훈련에 쓸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러므로 봉건 민병의 규율과 훈련은 모두 점차 무너졌고,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상비군이 점차 도입되었다. 게다가 한 문명 국민이 상비군이라는 방책을 일단 채택하자, 그 모든 이웃도 그 본보기를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곧 자기들의 안전이 그렇게 하는 데 달려 있으며, 자기들의 민병으로는 그런 군대의 공격에 전혀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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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비군의 병사들은 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더라도 흔히 고참 부대의 모든 용기를 지닌 것처럼 보였고, 싸움터에 나서는 바로 그 순간부터 가장 강인하고 경험 많은 고참병들과 맞설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1756년 러시아 군대가 폴란드로 진군했을 때, 러시아 병사들의 용맹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인하고 경험 많은 고참병이라 여겨지던 프로이센 병사들의 용맹에 뒤지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그 전 거의 20년 동안 깊은 평화를 누렸으며, 당시 적을 본 적이 있는 병사는 매우 적었을 것이다. 1739년 에스파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잉글랜드는 약 28년 동안 깊은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그 병사들의 용맹은 그 긴 평화로 타락하기는커녕, 그 불운한 전쟁의 첫 불운한 작전이었던 카르타헤나(Carthagena) 공격에서보다 더 두드러진 적이 없었다. 긴 평화 속에서 장군들은 아마 때로 그 기술을 잊을지 모른다. 그러나 잘 정비된 상비군이 유지되어 온 곳에서는 병사들이 결코 그 용맹을 잊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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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국민이 방위를 민병에 의존하면, 그 나라는 언제나 마침 이웃에 있는 어떤 미개 민족에게든 정복당할 위험에 노출된다. 아시아의 모든 문명국이 타타르인에게 자주 정복당한 것은 미개 민족의 민병이 문명 국민의 민병에 대해 갖는 자연적 우위를 충분히 증명한다. 잘 정비된 상비군은 모든 민병보다 우세하다. 그런 군대는 부유한 문명 국민만이 가장 잘 유지할 수 있듯이, 그런 국민을 가난하고 미개한 이웃의 침략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것도 그런 군대뿐이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의 문명이든 상당한 기간 영속하거나 보존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상비군에 의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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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국을 방어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잘 정비된 상비군에 의해서이듯, 미개한 나라를 단기간에 그럭저럭 문명화할 수 있는 것도 오직 그것에 의해서다. 상비군은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제국의 가장 먼 지방들에까지 군주의 법을 확립하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떤 정규 정부도 받아들일 수 없었을 나라들에서 어느 정도의 정규 정부를 유지한다.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가 러시아 제국에 도입한 개혁을 주의 깊게 검토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이 거의 모두 잘 정비된 상비군의 확립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의 다른 모든 규정을 집행하고 유지하는 도구다. 그 제국이 그 이후 줄곧 누려 온 그 정도의 질서와 국내 평화는 전적으로 그 군대의 영향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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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주의 원칙을 지닌 사람들은 상비군이 자유에 위험하다고 경계해 왔다. 장군과 주요 장교들의 이익이 국가 구조의 유지와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는 확실히 그렇다. 카이사르(Caesar)의 상비군은 로마 공화정을 파괴했다. 크롬웰의 상비군은 장기 의회를 문밖으로 내쫓았다. 그러나 군주 자신이 장군이고 그 나라의 주요 귀족과 젠트리가 군대의 수석 장교인 곳, 곧 군사력이 시민적 권위의 유지에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그들 자신이 그 권위의 가장 큰 몫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의 지휘 아래 놓여 있는 곳에서는 상비군이 결코 자유에 위험할 수 없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자유에 유리할 수도 있다. 상비군이 군주에게 주는 안전은, 일부 근대 공화국에서 가장 사소한 행동까지 감시하고 언제라도 모든 시민의 평온을 어지럽힐 태세를 갖춘 것처럼 보이는 그 성가신 경계심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집정자의 안전이 그 나라의 주요 인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모든 대중적 불만으로 위태로워지는 곳, 작은 소요가 몇 시간 안에 큰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곳에서는, 정부에 대한 모든 불평과 불만을 진압하고 처벌하는 데 정부의 모든 권위를 동원해야 한다. 반대로 그 나라의 자연적 귀족뿐 아니라 잘 정비된 상비군의 지지를 받는다고 느끼는 군주에게는, 가장 무례하고 가장 근거 없고 가장 방종한 항의도 별다른 동요를 주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안심하고 용서하거나 무시할 수 있으며, 자기 우월함에 대한 의식은 자연히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이끈다. 방종에 가까운 정도의 자유는 군주가 잘 정비된 상비군으로 안전을 보장받는 나라에서만 용인될 수 있다. 그런 나라에서만 공공의 안전이 이 방종한 자유의 무례한 방자함까지 억누르기 위한 재량권을 군주에게 맡기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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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군주의 첫째 의무, 곧 사회를 다른 독립된 사회들의 폭력과 불의로부터 방어하는 의무는 사회가 문명화되어 감에 따라 점점 더 많은 비용이 든다. 원래 평시에도 전시에도 군주에게 아무런 비용을 들게 하지 않았던 사회의 군사력은, 개량이 진보함에 따라 처음에는 전시에, 나중에는 평시에도 군주가 부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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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기의 발명으로 전쟁 기술에 도입된 큰 변화는 평시에 일정 수의 병사를 훈련하고 규율하는 비용과 전시에 그들을 사용하는 비용을 모두 더욱 높였다. 그들의 무기와 탄약이 모두 더 비싸졌다. 머스킷총은 투창이나 활과 화살보다 비싼 기계이며, 대포나 박격포는 노포(弩砲, balista)나 투석기(catapulta)보다 비싼 기계다. 근대의 열병식에서 소비되는 화약은 회수할 수 없이 사라지며, 매우 상당한 비용을 일으킨다. 고대의 열병식에서 던지거나 쏜 투창과 화살은 쉽게 다시 주울 수 있었고, 게다가 가치도 매우 적었다. 대포와 박격포는 노포나 투석기보다 훨씬 비쌀 뿐 아니라 훨씬 무거운 기계이며, 그것을 싸움터에 내보낼 준비를 하는 데뿐 아니라 싸움터로 운반하는 데에도 더 많은 비용이 든다. 또한 고대인의 포병에 대한 근대 포병의 우위가 매우 크기 때문에, 그 우세한 포병의 공격에 단 몇 주라도 저항할 수 있도록 도시를 요새화하기가 훨씬 어려워졌고, 따라서 훨씬 비용이 많이 들게 되었다. 근대에는 여러 원인이 사회 방위를 더 비싸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개량의 자연스러운 진보가 낳는 불가피한 효과는 이 점에서 전쟁 기술의 큰 혁명으로 상당히 증폭되었는데, 그 혁명은 화약의 발명이라는 단순한 우연이 계기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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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전쟁에서 화기의 큰 비용은 그 비용을 가장 잘 감당할 수 있는 국민에게, 따라서 가난하고 미개한 국민에 대해 부유하고 문명화된 국민에게 분명한 이점을 준다. 고대에는 부유하고 문명화된 국민이 가난하고 미개한 국민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하기 어려웠다. 근대에는 가난하고 미개한 국민이 부유하고 문명화된 국민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하기 어렵다. 언뜻 보기에 그토록 해로워 보이는 발명인 화기의 발명은 확실히 문명의 영속과 확장 모두에 유리하다.

Q1확인

스미스가 말하는 군주의 '첫째 의무'는 무엇이며, 그것은 무엇으로만 수행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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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2적용

나라를 지키는 비용을 누가, 얼마나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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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애덤 스미스, 『국부론』 제1절. Project Gutenberg 영어 전자본을 저본으로 옮김. 원문: Project Gutenberg eBook #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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