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몰락 이후 도시 주민들은 시골 주민들보다 더 우대받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옛 공화국의 최초 주민들과는 매우 다른 계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뒤의 사람들은 주로 토지 소유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공공 영토는 원래 그들 사이에 분배되었고, 그들은 공동 방어를 위해 서로 가까이 집을 짓고 그것을 성벽으로 둘러싸는 것이 편리하다고 여겼다. 반대로 로마 제국 몰락 이후에는 토지 소유자들이 대개 자기 영지의 요새화된 성에서 자기 차지인과 예속민들 한가운데 살았던 듯하다. 도시에는 주로 상인과 기계공이 살았는데, 그들은 당시 노예 신분이거나 그에 매우 가까운 신분이었던 듯하다. 유럽의 몇몇 주요 도시의 주민들에게 옛 특허장으로 부여된 특권들은 그 부여 이전에 그들이 어떠했는지를 충분히 보여 준다. 영주의 동의 없이 자기 딸을 결혼시킬 수 있다는 것, 그들이 죽으면 영주가 아니라 자기 자녀가 재산을 상속한다는 것, 그리고 유언으로 자기 재산을 처분할 수 있다는 것이 특권으로 부여된 사람들은, 그 부여 이전에는 시골의 토지 점유자들과 완전히, 혹은 거의 같은 농노 상태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사실 그들은 매우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었던 듯하며, 오늘날의 행상과 도붓장수처럼 자기 재화를 가지고 이곳저곳, 이 장터 저 장터로 돌아다닌 듯하다. 당시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는 오늘날 아시아의 몇몇 타타르 정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행자가 특정 장원을 지나갈 때, 특정 다리를 건널 때, 장터에서 재화를 이곳저곳 가지고 다닐 때, 그것을 팔기 위해 장터에 노점이나 좌판을 세울 때 그들의 신체와 재화에 세금이 부과되곤 했다. 이 여러 세금은 잉글랜드에서 통행세(passage), 교량세(pontage), 적재세(lastage), 노점세(stallage)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때로는 국왕이, 때로는 어떤 경우에 이렇게 할 권한을 가졌던 듯한 대영주가 특정 상인들, 특히 자기 직할지에 사는 상인들에게 그런 세금의 전반적 면제를 허용하곤 했다. 그런 상인들은 다른 점에서는 노예 신분이거나 그에 매우 가까운 신분이었지만, 이 때문에 자유 상인(free traders)이라 불렸다. 그들은 그 대가로 보통 자기 보호자에게 일종의 연간 인두세를 냈다. 당시에는 값진 대가 없이 보호가 주어지는 일이 드물었으며, 이 세금은 아마 그들의 후원자가 그들을 다른 세금에서 면제함으로써 잃을 수 있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 인두세와 면제가 모두 전적으로 개인적이었고, 특정 개인에게만, 그것도 그들의 생애 동안이나 보호자의 뜻이 있는 동안에만 해당했던 듯하다. 잉글랜드의 몇몇 도시에 관해 『둠즈데이 북(Doomsday-book)』에서 출판된 매우 불완전한 기록에는, 때로는 특정 시민들이 이런 종류의 보호에 대해 국왕이나 다른 어떤 대영주에게 각자 낸 세금이, 때로는 그 모든 세금의 총액만이 자주 언급된다. {브래디(Brady), 『도시와 자치도시에 관한 역사적 논고(Historical Treatise of Cities and Boroughs)』, 3쪽 이하 참조.}
그러나 도시 주민들의 처지가 원래 아무리 노예 같았다 하더라도, 그들이 시골의 토지 점유자들보다 훨씬 일찍 자유와 독립에 이르렀다는 것은 분명하다. 국왕의 수입 가운데 어느 특정 도시의 그런 인두세에서 나오는 부분은 보통 일정 기간 동안 확정 지대를 받고 때로는 주의 장관에게,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청부로 맡겨지곤 했다. 시민들 자신이 흔히 충분한 신용을 얻어 자기 도시에서 나오는 이런 종류의 수입을 청부받도록 허용되었으며, 그들은 그 지대 전액에 대해 연대하여 책임을 졌다. {매덕스(Madox), 『자치도시 청부(Firma Burgi)』, 18쪽, 또한 『재무부사(History of the Exchequer)』, 제10장 제5절, 223쪽, 초판 참조.} 이런 방식으로 청부를 주는 것은, 내가 믿기로 유럽의 모든 나라의 군주들의 통상적인 살림살이에 꼭 맞는 일이었다. 그들은 흔히 장원 전체를 그 장원의 모든 차지인에게 청부로 주었으며, 차지인들은 그 지대 전액에 대해 연대하여 책임을 지는 대신 그것을 자기들 방식으로 징수하여 자기 관리인의 손으로 국왕의 재무부에 납부하도록 허용되었고, 그리하여 국왕 관리들의 오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이는 당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처음에는 도시 청부가 아마 다른 청부인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일정 기간 동안만 시민들에게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을 그들에게 영구 보유(in fee)로, 즉 영원히 주되 그 뒤로 결코 올리지 않을 확정 지대를 유보하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 된 듯하다. 지불이 이렇게 영구적인 것이 되자 그 대가로 주어진 면제도 자연히 영구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 면제는 개인적인 것이기를 그쳤으며, 그 뒤로는 개인으로서의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자치도시의 시민으로서의 그들에게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치도시는 이 때문에 자유 자치도시(free burgh)라 불렸는데, 이는 그들이 자유 시민 또는 자유 상인이라 불렸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 부여와 함께, 위에서 말한 중요한 특권들, 즉 자기 딸을 결혼시킬 수 있다는 것, 자녀가 자기를 상속한다는 것, 유언으로 자기 재산을 처분할 수 있다는 것이 대개 그것을 받은 도시의 시민들에게 주어졌다. 그런 특권이 이전에도 보통 상업의 자유와 함께 개인으로서의 특정 시민들에게 주어졌는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그랬을 가능성이 낮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떠했든, 농노제와 노예제의 주요 속성들이 이렇게 그들에게서 제거되었으므로, 그들은 이제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자유라는 말의 의미에서 진정으로 자유롭게 되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개 동시에 하나의 자치 단체 또는 법인으로 세워졌으며, 자기 행정관과 시의회를 둘 특권, 자기 통치를 위한 조례를 만들 특권, 자기 방어를 위한 성벽을 쌓을 특권, 그리고 모든 주민에게 경계 근무(watch and ward), 즉 옛날의 이해대로 낮이든 밤이든 모든 공격과 기습에 맞서 그 성벽을 지키고 방어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일종의 군사 규율 아래 둘 특권을 가졌다. 잉글랜드에서 그들은 대개 헌드레드 법원과 주 법원에 출석할 의무를 면제받았으며, 국왕 소송을 제외하고 그들 사이에서 생기는 모든 소송은 그들 자신의 행정관의 판결에 맡겨졌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흔히 훨씬 크고 넓은 관할권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매덕스, 『자치도시 청부』 참조. 또한 페펠(Pfeffel)의 『프리드리히 2세와 그 슈바벤 왕가 계승자들 치하의 주목할 만한 사건들』 참조.}
자기 수입을 청부받도록 허용된 도시에는 아마 자기 시민들에게 지불을 강제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강제 관할권을 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 무질서한 시대에 그들로 하여금 이런 종류의 정의를 다른 어떤 법정에서 구하게 내버려 두었다면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모든 나라의 군주들이 아마 모든 수입 가운데 그들 자신의 비용이나 주의 없이 사물의 자연적 흐름에 의해 늘어날 가능성이 가장 큰 그 수입 부문을, 이런 식으로 결코 더 올릴 수 없는 확정 지대와 교환했다는 것, 그리고 게다가 이런 식으로 자기 영토 한복판에 일종의 독립 공화국들을 자발적으로 세웠다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당시 아마 유럽의 어느 나라의 군주도 자기 영토 전역에서 신민 가운데 약한 사람들을 대영주들의 억압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법이 보호할 수 없고 스스로를 지킬 만큼 강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대영주의 보호에 의지하여 그것을 얻기 위해 그의 노예나 봉신이 되거나, 서로를 공동으로 보호하기 위해 상호 방위 동맹을 맺어야 했다. 도시와 자치도시의 주민들은 개개인으로는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었지만, 이웃과 상호 방위 동맹을 맺음으로써 결코 얕볼 수 없는 저항을 할 수 있었다. 영주들은 시민들을 경멸했으며, 그들을 다른 계층일 뿐만 아니라 해방된 노예 무리, 거의 자기들과 다른 종족으로 여겼다. 시민들의 부는 언제나 영주들의 질투와 분노를 불러일으켰으며, 영주들은 기회만 있으면 자비도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들을 약탈했다. 시민들은 자연히 영주들을 미워하고 두려워했다. 국왕도 영주들을 미워하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국왕은 아마 시민들을 경멸했을지는 몰라도 그들을 미워하거나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므로 상호 이해관계 때문에 시민들은 국왕을 지지하고 국왕은 영주들에 맞서 시민들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국왕의 적의 적이었으며, 그들을 그 적들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안전하고 독립적으로 만드는 것이 국왕의 이익이었다. 그들에게 자기 행정관, 자기 통치를 위한 조례를 만들 특권, 자기 방어를 위한 성벽을 쌓을 특권, 모든 주민을 일종의 군사 규율 아래 둘 특권을 줌으로써, 국왕은 자기가 줄 수 있는 모든 안전의 수단과 영주들로부터의 독립의 수단을 그들에게 주었다. 이런 종류의 어떤 정규적인 통치의 확립 없이는, 즉 주민들로 하여금 어떤 일정한 계획이나 체계에 따라 행동하도록 강제할 어떤 권위 없이는, 어떤 자발적인 상호 방위 동맹도 그들에게 영구적인 안전을 주거나 그들이 국왕에게 상당한 지원을 할 수 있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기 도시의 청부를 영구 보유로 줌으로써, 국왕은 자기가 친구로, 말하자면 동맹자로 삼고 싶어 한 사람들에게서 그가 나중에 그들 도시의 청부 지대를 올리거나 그것을 다른 청부인에게 줌으로써 그들을 억압하리라는 질투와 의심의 근거를 모두 없앴다.
그래서 자기 영주들과 가장 사이가 나빴던 군주들이 자기 자치도시들에 이런 종류의 특권을 가장 관대하게 부여했던 듯하다. 예컨대 잉글랜드의 존 왕(King John)은 자기 도시들에 가장 관대한 은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덕스 참조.} 프랑스의 필리프 1세(Philip I)는 자기 영주들에 대한 모든 권위를 잃었다. 그의 치세 말 무렵, 나중에 비만왕 루이(Lewis the Fat)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의 아들 루이는 다니엘(Daniel) 신부에 따르면 왕령지의 주교들과 대영주들의 폭력을 억제할 가장 적절한 수단에 관해 의논했다. 그들의 조언은 두 가지 다른 제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그의 직할지의 모든 상당한 도시에 행정관과 시의회를 설치하여 새로운 관할 체계를 세우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 도시의 주민들로 하여금 자기 행정관의 지휘 아래 적절한 때에 국왕을 돕기 위해 출진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민병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프랑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도시의 행정관과 의회 제도가 시작된 것은 이 시기부터이다. 독일의 자유 도시 대부분이 처음으로 특권을 부여받고 그 유명한 한자 동맹(Hanseatic league)이 처음으로 위협적인 존재가 된 것은 슈바벤 왕가 군주들의 불운한 치세 동안이었다. {페펠 참조.}
당시 도시의 민병대는 시골의 민병대에 뒤지지 않았던 듯하며, 갑작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 더 빨리 소집될 수 있었으므로 이웃 영주들과의 분쟁에서 흔히 우세했다. 이탈리아나 스위스처럼 정부의 주된 소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나라 자체가 자연적으로 견고하거나, 다른 어떤 이유로 군주가 그 권위 전체를 잃게 된 나라들에서는 도시들이 대개 독립 공화국이 되어 근방의 모든 귀족을 정복하고, 그들로 하여금 시골의 성을 허물고 다른 평화로운 주민들처럼 도시에 살게 했다. 이것이 베른 공화국과 스위스의 다른 여러 도시의 간략한 역사이다. 역사가 다소 다른 베네치아를 제외하면, 이것은 12세기 말부터 16세기 초 사이에 그토록 많이 일어났다가 사라진 모든 상당한 이탈리아 공화국의 역사이다.
프랑스와 잉글랜드처럼 군주의 권위가 흔히 매우 약하기는 했지만 결코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은 나라들에서는 도시들이 완전히 독립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그 도시들은 매우 중요해져서, 군주는 도시의 정해진 청부 지대 말고는 그들 자신의 동의 없이 그들에게 아무런 세금도 부과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왕국의 신분 총회에 대표를 보내도록 요청받았으며, 거기서 긴급한 경우에 성직자와 영주들과 함께 국왕에게 어떤 이례적인 보조금을 승인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대개 국왕의 권력에 더 우호적이었으므로, 그들의 대표는 때로 국왕에 의해 그 회의에서 대영주들의 권위에 맞서는 평형추로 쓰였던 듯하다. 유럽의 모든 큰 군주국의 신분 총회에서 자치도시가 대표를 가지게 된 기원은 여기에 있다.
이렇게 해서 시골의 토지 점유자들이 온갖 종류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던 시기에 도시에서는 질서와 좋은 통치, 그리고 그와 함께 개인의 자유와 안전이 확립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무방비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자연히 필요한 생활 자료에 만족한다. 더 많이 얻는 것은 억압자들의 불의를 유혹할 뿐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기 근로의 열매를 누릴 수 있다고 확신할 때 그들은 자연히 그 근로를 발휘하여 자기 처지를 개선하고 생활필수품뿐만 아니라 생활의 편의품과 우아한 물건까지 얻으려 한다. 그러므로 필요한 생활 자료 이상의 무언가를 목표로 하는 근로는 시골의 토지 점유자들이 그것을 흔히 행하기 훨씬 전에 도시에서 확립되었다. 농노제의 예속에 억압받는 가난한 경작자의 손에 얼마 안 되는 자산이 축적되면, 그는 자연히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속하게 될 주인에게서 매우 조심스럽게 그것을 숨기고, 첫 기회에 도시로 도망쳤을 것이다. 당시 법은 도시 주민들에게 매우 관대했고 시골 주민들에 대한 영주들의 권위를 줄이기를 매우 바랐으므로, 그가 영주의 추적을 피해 그곳에서 1년 동안 숨어 있을 수 있으면 영원히 자유로웠다. 그러므로 시골 주민 가운데 근면한 사람들의 손에 축적된 자산은 무엇이든 자연히 그것을 얻은 사람에게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인 도시로 피신했다.
도시의 주민들이 언제나 궁극적으로 그들의 생활 자료와 그들 근로의 모든 재료와 수단을 시골에서 얻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해안이나 배가 다닐 수 있는 강기슭 가까이 자리한 도시의 주민들은 그것을 반드시 근방의 시골에서만 얻도록 제한되어 있지는 않다. 그들은 훨씬 넓은 범위를 가지며, 자기 근로의 제조품과 교환하여, 혹은 먼 나라들 사이에서 운송인의 역할을 하며 한 나라의 산출물을 다른 나라의 산출물과 교환함으로써 세계의 가장 먼 구석에서 그것을 끌어올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한 도시는 근방의 시골뿐만 아니라 그것이 교역하는 모든 나라가 빈곤하고 비참한 상태에 있는 동안에도 큰 부와 영화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나라들 각각은 아마 따로 보면 그 도시에 생활 자료나 일거리의 작은 부분밖에 제공하지 못했겠지만, 그 모두를 합치면 큰 생활 자료와 큰 일거리를 모두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상업의 좁은 범위 안에도 부유하고 근면한 나라들이 몇몇 있었다. 그리스 제국이 존속하는 동안의 그리스 제국, 아바스 왕조 치세 동안의 사라센 제국이 그러했다. 또한 투르크인에게 정복되기 전까지의 이집트, 바르바리(Barbary) 해안의 일부, 그리고 무어인의 통치 아래 있던 스페인의 모든 지방도 그러했다.
유럽에서 상업으로 상당한 정도의 부유함에 이른 첫 도시들은 이탈리아의 도시들이었던 듯하다. 이탈리아는 당시 세계의 개량되고 문명화된 지역의 중심에 있었다. 또한 십자군은 그것이 일으킨 자산의 막대한 낭비와 주민의 파멸로 유럽 대부분의 진보를 반드시 늦추었겠지만, 몇몇 이탈리아 도시의 진보에는 매우 유리했다. 성지 정복을 위해 사방에서 진군한 대군은 때로는 그들을 그곳으로 수송함으로써, 그리고 언제나 그들에게 식량을 공급함으로써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Pisa)의 해운에 이례적인 장려가 되었다. 그 도시들은 말하자면 그 군대의 병참 담당자였으며, 유럽 국민들에게 닥친 가장 파괴적인 광기가 그 공화국들에게는 부유함의 원천이 되었다.
상업 도시의 주민들은 더 부유한 나라들의 개량된 제조품과 값비싼 사치품을 수입함으로써 대소유자들의 허영에 얼마간 양식을 제공했으며, 대소유자들은 자기 토지의 원생산물을 대량으로 주고 그것을 열심히 샀다. 그래서 당시 유럽 대부분의 상업은 주로 자기의 원생산물과 더 문명화된 국민의 제조품을 교환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잉글랜드의 양모는 프랑스의 포도주와 플랑드르의 고급 모직물과 교환되곤 했는데, 이는 오늘날 폴란드의 곡물이 프랑스의 포도주와 브랜디, 그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비단과 벨벳과 교환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외국 상업에 의해 더 고급이고 더 개량된 제조품에 대한 취향이 그런 제품을 만들지 않는 나라들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 취향이 상당한 수요를 일으킬 만큼 일반화되자, 상인들은 운송비를 절약하기 위해 자연히 자기 나라에 같은 종류의 제조업을 세우려고 애썼다. 로마 제국 몰락 이후 유럽의 서부 지방들에 세워진 듯한 먼 곳에 팔기 위한 최초의 제조업의 기원은 여기에 있다.
주목할 점은, 어떤 큰 나라도 그 안에서 어떤 종류의 제조업이 영위되지 않고는 존속한 적이 없고 존속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라에 대해 제조업이 없다고 말할 때에는 언제나 더 고급이고 더 개량된 제조업, 즉 먼 곳에 팔기에 알맞은 제조업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모든 큰 나라에서 국민의 훨씬 큰 부분의 의복과 가재도구는 그들 자신의 근로의 산물이다. 이것은 제조업이 풍부하다고들 하는 부유한 나라보다 흔히 제조업이 없다고들 하는 가난한 나라에서 더욱 보편적으로 그러하다. 앞의 나라에서는 대개 가장 낮은 계층 사람들의 의복과 가재도구에서도 뒤의 나라에서보다 외국 산물이 훨씬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을 볼 것이다.
먼 곳에 팔기에 알맞은 제조업은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여러 나라에 도입된 듯하다.
때로는 위에서 말한 방식으로, 즉 말하자면 특정 상인과 사업 경영자들의 자산의 난폭한 작용으로 도입되었는데, 그들은 같은 종류의 어떤 외국 제조업을 모방하여 그것을 세웠다. 그러므로 그런 제조업은 외국 상업의 소산이다. 13세기 동안 루카(Lucca)에서 번성한 옛 비단, 벨벳, 금란 제조업이 그러했던 듯하다. 그것은 마키아벨리(Machiavel)의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인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Castruccio Castracani)의 폭정으로 그곳에서 쫓겨났다. 1310년에 900가구가 루카에서 쫓겨났는데, 그 가운데 31가구가 베네치아로 물러가 그곳에 비단 제조업을 도입하겠다고 제안했다. {산디(Sandi), 『베네치아 시민사(Istoria civile de Vinezia)』, 제2부 제1권, 247쪽과 256쪽 참조.} 그들의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그들에게 많은 특권이 주어졌으며, 그들은 300명의 노동자로 제조업을 시작했다. 예전에 플랑드르에서 번성했고 엘리자베스 치세 초에 잉글랜드에 도입된 고급 모직물 제조업도 그러했던 듯하며, 현재의 리옹과 스피털필즈(Spitalfields)의 비단 제조업도 그러하다. 이런 방식으로 도입된 제조업은 외국 제조업의 모방이므로 대개 외국 원료로 일한다. 베네치아의 제조업이 처음 세워졌을 때 원료는 모두 시칠리아와 레반트(Levant)에서 들여왔다. 더 오래된 루카의 제조업도 마찬가지로 외국 원료로 영위되었다. 뽕나무 재배와 누에 치기는 16세기 이전에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흔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 기술은 샤를 9세(Charles IX) 치세에 이르러서야 프랑스에 도입되었다. 플랑드르의 제조업은 주로 스페인과 잉글랜드의 양모로 영위되었다. 스페인 양모는 잉글랜드 최초의 모직물 제조업의 원료가 아니라, 먼 곳에 팔기에 알맞은 최초의 모직물 제조업의 원료였다. 리옹 제조업의 원료의 절반 이상이 오늘날 외국 비단이며, 처음 세워졌을 때에는 그 전부 또는 거의 전부가 그러했다. 스피털필즈 제조업의 원료는 어떤 부분도 잉글랜드의 산물이 될 가능성이 없다. 그런 제조업은 대개 소수 개인의 계획과 구상으로 도입되므로, 그 소재지는 그들의 이해관계나 판단이나 변덕이 정하는 데 따라 때로는 해안 도시에, 때로는 내륙 도시에 세워진다.
다른 때에는 먼 곳에 팔기 위한 제조업이 가장 가난하고 미개한 나라에서도 언제나 영위될 수밖에 없는 가내의 거친 제조업이 점차 세련됨으로써 자연히, 말하자면 저절로 성장한다. 그런 제조업은 대개 그 나라가 생산하는 원료로 일하며, 흔히 해안에서, 그리고 때로는 모든 수운에서도 매우 멀지는 않지만 상당히 떨어진 내륙 지방에서 처음 세련되고 개량된 듯하다. 본래 비옥하고 경작하기 쉬운 내륙 지방은 경작자를 부양하는 데 필요한 것을 넘는 큰 잉여 식량을 생산하며, 육상 운송비와 하천 수운의 불편 때문에 이 잉여를 외국으로 보내기가 흔히 어려울 수 있다. 그러므로 풍부함은 식량을 싸게 만들며, 많은 노동자들이 근방에 정착하도록 장려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자기 근로로 다른 곳에서보다 더 많은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토지가 생산하는 제조 원료를 가공하며, 자기 완제품, 혹은 같은 이야기지만 그 가격을 더 많은 원료와 식량과 교환한다. 그들은 원생산물의 잉여 부분을 물가나 어떤 먼 시장으로 운반하는 비용을 절약해 줌으로써 그것에 새로운 가치를 주며, 경작자들에게 그 대가로 그들에게 유용하거나 마음에 드는 무언가를 이전에 얻을 수 있었던 것보다 쉬운 조건으로 제공한다. 경작자들은 자기 잉여 산출물에 대해 더 좋은 가격을 받으며, 자기에게 필요한 다른 편의품을 더 싸게 살 수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토지의 더 이상의 개량과 더 나은 경작으로 이 잉여 산출물을 늘리도록 장려받는 동시에 그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토지의 비옥함이 제조업을 낳았듯이, 제조업의 진보는 토지에 반작용하여 그 비옥함을 더욱 높인다. 제조업자들은 처음에는 근방에 공급하고, 나중에 그들의 제품이 개량되고 세련됨에 따라 더 먼 시장에 공급한다. 원생산물이나 거친 제조품조차 상당한 육상 운송의 비용을 큰 어려움 없이는 감당할 수 없지만, 세련되고 개량된 제조품은 쉽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은 부피 안에 흔히 많은 양의 원생산물의 가격을 담고 있다. 예컨대 무게가 80파운드에 불과한 고급 모직물 한 필은 그 안에 양모 80파운드의 가격뿐만 아니라 때로는 수천 파운드 무게의 곡물, 즉 여러 노동자와 그들의 직접 고용주의 부양비의 가격을 담고 있다. 그 자체의 형태로는 외국으로 운반하기 어려웠을 곡물이 이런 방식으로 완성된 제조품의 형태로 사실상 수출되며, 세계의 가장 먼 구석까지 쉽게 보내질 수 있다. 리즈(Leeds), 핼리팩스(Halifax), 셰필드, 버밍엄, 울버햄프턴(Wolverhampton)의 제조업은 이런 방식으로 자연히, 말하자면 저절로 성장했다. 그런 제조업은 농업의 소산이다. 유럽의 근대사에서 그 확대와 개량은 대개 외국 상업의 소산인 제조업의 확대와 개량보다 나중이었다. 잉글랜드는 위에서 말한 곳들에서 지금 번성하는 제조업 가운데 어느 것이 외국에 팔기에 알맞게 되기 한 세기도 더 전에 스페인 양모로 만든 고급 모직물 제조업으로 유명했다. 이 뒤의 제조업들의 확대와 개량은 농업의 확대와 개량의 결과로서만 일어날 수 있었는데, 농업의 확대와 개량은 외국 상업과 그것이 직접 도입한 제조업의 마지막이자 가장 큰 효과이며, 이제 나는 그것을 설명하려 한다.